홍타이지는 조선이 17세기 전기의 변화된 국제관계를 인정하여 자신을 명의 황제와 대등하게 대해주기를 바랐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이미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은 “왜 조선은 그때 명나라를 버리고 후금을 편들지 않았는가”라고 쉽게 말하지만, 당시 명나라는 건재한 상태였다.
더욱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여 명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명나라에서 돌았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대응이 곤란하였다. 우방이라도 믿지 않는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당시 유라시아 동부의 급변하는 정세에서 ‘독립 변수’는 명과 후금뿐이었으며, 조선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교묘한 외교를 전개하는 한편으로 힘껏 군사력을 확보했다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수의 조총과 100년간의 실전 경험을 전수받은 20여만명의 일본군의 침공을 받은 조선에, 그러한 역량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로 즉위한 1636년의 12월,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 전쟁 발발이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던 최명길은, 만약 정말로 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면 인조가 직접 압록강가로 나아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 전쟁에 지더라도 피해 범위가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만을 믿고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국왕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항복했으며, 믿었던 강화도는 쉽사리 함락되었다. 청군의 기동력을 무시하고 그들의 해전(海戰) 수행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알지 못한 결과였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청나라는 조선으로 하여금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현재 서울 잠실 석촌호숫가에 서 있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일명 삼전도비(三田渡碑)가 그것이다. 청나라의 공식적인 3개 언어인 만주어·몽골어·중국어로 적힌 이 비석은 청 측의 요구로 세워지고 비문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 측에서 지정하였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읽어 보면,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홍타이지가 패전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음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처럼 되어 있다. 비문의 첫머리에서는 “인자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신성한 한(han)께서 ‘화친을 깨뜨린 것이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며’ 병자호란을 일으키셨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작은 나라가 윗나라에 죄를 얻음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여 1619년 사르후전투, 정묘호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하기에 “신성한 한(han) 홍타이지는 여전히 관대하게 즉시 군대를 보내 오지 않고, 분명한 칙령을 내려 거듭거듭 조선 조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마치 귀를 잡고 가르치는 것보다 또한 더하였다” 라고 적는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병자호란의 원인은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비문에서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하기로 결심했다고 적는다. “내가 정묘호란 이래 큰 나라와 화친하여 10년이다. 내가 무능하고 우매하여 하늘이 정복함을 서둘렀고 만민 백성이 재난을 만났으니 이 죄는 나의 단 하나의 몸에 있다.
그러나 신성한 한(han)은 차마 조선의 민관을 죽이지 못하여 이처럼 깨닫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조상들의 도(道)를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칙령을 받지 않겠는가?” 실제로는 인조가 어떻게든 홍타이지의 앞에 절하는 항복 의례만은 피하고자 노력했으나 좌절한 것이었으나, 비석에서는 그러한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조선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여 황제의 공덕을 찬미하는 비석을 세우기로 했다고 주장된다. “이런 큰 천복을 내린 바, 작은 나라의 주군과 신하들과 포로된 자식들과 부인들이 모두 예전처럼 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이 되고 마른 가뭄이 바뀌어 계절의 비가 내린 것 같았다. 작은 나라가 망한 것을 다시 있게 했다.” 전후에 수십만 명의 포로가 끌려갔음을 생각하면 뻔뻔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청 측은 도리어 청이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고 주장한다.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주장한 개념인데, 이 개념을 홍타이지의 청나라가 차용한 것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어디까지나 하늘의 뜻에 맞는 정당한 전쟁을 수행한 것이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적대하는 죄를 지은 조선은 정벌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인이 자국의 죄를 자아비판하는 내용을 비석으로 남기게 했다.
이리하여 청나라에 있어서 눈엣가시였던 조선이 굴복하고 한반도 문제가 종결되었다.
(한명기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