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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6 16:18
[한국사] 금 건국시 동아시아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51  

아골타와 금(金) 건국
 

1 (1).jpg

金 太祖 아골타.


동북9성을 여진에 반환한 지 4년여 후인 1113년 완안부에서는 존장 오아속이 사망하고 동생 아골타(阿骨打)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여진 부족을 통합한 후 거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아골타가 거란에 반기를 든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반복되는 양태였다. 거란의 국세가 기울고 여진은 이제 유목세계의 새로운 맹주가 되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요사》에 의하면, 아골타는 대를 잇기 전인 1112년 거란 황제가 관례에 따라 여진의 존장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석상에서 정면으로 황제의 명을 거부한 적이 있다. 아골타는 이 연회에서 거란의 퇴조와 거란 황제의 지도력 부재를 목격한 것이다. 


자신이 존장에 오른 후에는 국상을 거란에 통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거란으로부터 문책이 있자 반기를 들었다. 아골타는 1114년 송화강 일대를 점거한 후 요동으로 진격해 거란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거란은 고려에 여진 협공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거병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이르러 아골타는 거란의 동북면 요충지인 황룡부를 함락시키고 이어 거란 황제의 친정군을 격파한 후 황제를 칭하면서 1114년 회령(하얼빈 동남)에 도읍해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거란은 다시 고려에 원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고려 조정은 거란과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해 원군을 보내자는 출병론자와 김부식 등 타국 싸움에 끼어들어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장래의 이해를 측량하기 어려운 위험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출병불가론자의 의견이 대립했으나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금의 아골타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이 곧 거란을 평정할 것임을 알려 왔다. 이제 고려와 금의 관계정립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고려 조정은 거란이 멸망의 위기에 있으므로 더 이상 거란의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고려가 성종 13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 지 120여 년 만에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거란에 대해 형식적 관계는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송에 기울어지고 송과의 사절, 문물교환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즈음 금군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내원성(현 요하지역)은 함락되고 거란군은 선박을 이용해 도주했다.  
  
  父母之國에서 兄弟之國으로
  
1117년 금은 사절을 고려에 보내 국서를 전하면서 양국 간에 형제관계로 통교하자고 제의했다. “대여진 금국 황제는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거란을 대국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던바, 거란이 무도하게 우리의 강역을 침략하고 우리의 백성을 노예로 해 명분없는 무력을 가해 왔다. 우리는 부득이 이에 항거해 하늘의 도움을 입어 그를 진멸했다. 


고려 왕은 우리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고려를 아우로)를 맺어 대대로 무궁한 화호(和好)를 이루자”(금사, 고려전)고 했다. 8년 전(예종4년) 여진은 고려를 부모지국이라고 했으나 이제 ‘결위형제’를 제의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모두가 금과의 형제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크게 반대했고, 심지어는 금의 사신을 처형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때 홀로 김부의(金富儀·김부식의 동생)가 상소하기를 “제가 보기에는 한이 흉노에 대해서나 당이 돌궐에 대해 혹은 공주를 시집 보내는 등 그들과 화친할 만한 길이라면 무슨 수단이나 다 적용하였습니다. 


지금 송과 같은 대국도 거란과 서로 백숙이니 형제니 하면서 대대로 화친하고 지내 왔습니다. 천자의 존엄이란 천하에 비할 바 없는데도 이처럼 오랑캐 나라에 대해 굴복하고 섬긴 것은 이것이 이른바 성인은 잠시 원칙을 버리고 권도로서 처사하여 국가를 보전하는 양책입니다”라고 했더니 대신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고 예종도 묵묵부답이었다. 김부의의 현실론이 절대다수의 명분론에 압도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거란은 점차 국내외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금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고 있었다. 1119년 금은 국서를 통해 북으로는 상경으로부터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정벌했다고 고려에 알려 왔다. 


이 국서는 지난번 서한보다 더 격을 높여 자신을 짐(朕)으로 시작하면서 고려를 종속국으로 비하시키고 있다. 고려는 답신을 통해 요동이 모두 고려의 땅이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내용과 함께 “하물며 그들의 (완안부) 선조가 우리 땅에서 나왔음이랴”고 했는데 금측은 이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고려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여진이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다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에 금이 이 문서를 접수할 경우 곤욕스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과 송은 叔姪之國의 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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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포로가 된 宋 휘종


금과 고려의 관계를 잠시 뒤로 미루고 여진의 부상에 송이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관해 살펴보자. 송의 휘종은 떠오르는 금을 활용해 거란에 빼앗긴 연운16주의 회수를 계획했다. 휘종은 1116년 고려에서 송에 사신으로 온 이자량(李資諒)을 특별히 대우한 후 비밀리에 “다음 번 올 때는 금나라 사람 몇을 데리고 와 달라”고 청했는데, 휘종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자량이 “금인은 인면수심이라 제휴할 것이 못된다”고 했다.

  
송 대신들은 고려가 송과 금의 통교를 방해하고자 한다고 오해하고 금과 직접 접촉할 것을 건의했다. 송 휘종은 해로를 이용해 금측에 거란 협공을 제의하면서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a)송이 거란에 제공하고 있는 세폐를 금에 제공한다. b)거란 협공에 있어 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하북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운의 반환을 의미) c)금은 거란과 화평협약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금도 이에 동의했다.

양군은 1121년 거란을 협공했다. 금군이 거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서경으로 쇄도하자 거란 황제는 서하의 음산으로 도주했다. 거란의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성으로 도주해 중앙아시아의 이리간(발하쉬 호) 부근에 카라키타이(西遼)를 세워 1227년까지 약100여 년간 거란의 명맥을 유지했다. 


카라키타이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한편 송군은 연운의 남경을 공략했으나 실패하자 금에 세폐를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요청해, 금군이 들어와 남경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송은 금에 약속한 세폐를 제공하지 않고 남경에서 일하던 거란 관리를 재등용하는 등 금과의 제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금 태종은 1125년 송을 공격했다. 금군이 수도 개봉에까지 육박하자 송은 

a) 금 500만 냥, 은 5000만 냥, 우마 1만 필 등을 제공하고 b) 하북, 태원의 요충지 3진 33주를 금에 할양하고 c) 양국관계를 숙부(叔父; 金)와 숙질(叔姪; 宋)로 한다는 굴욕적 조건을 제시해 일단 화전했다. 


송은 이 굴욕적인 관계와 감당할 수 없는 세폐 제공을 반전시키기 위해 다시 금 치하에 있는 거란 장수들을 부추기는 한편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고려는 송의 요청을 거부했다.
  
송이 약속이행을 늦추자 금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개봉을 함락시켰다. 송은 황하 이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금에 화의를 청했으나 이번에는 금이 듣지 않았다. 금은 1127년 휘종을 비롯한 황족을 사로잡고 재물을 모두 약탈해 만주로 회군했다. 이로써 송은 9대 168년 만에 멸망했다. 송 황실 중에서 유일하게 금에 잡혀가지 않은 휘종의 아들 강왕은 남경에서 즉위해 고종이 되었다. 그 후 금군의 추격을 받자 양쯔강 이남의 항주로 옮겨 도읍한 후 남송(南宋)을 건국했다.  
  
  兄弟之國에서 稱臣事大로
  
1122년 고려에서는 예종이 타계하고 인종이 즉위했으며, 금에서는 태조 아골타가 1123년 사망하고 태종이 즉위했다. 금 태종은 고려 인종에게 사신을 보내 “거란 천조가 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거란을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을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거란 천조를 잡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거란 황제도 도주했으니 고려가 금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즉위를 통보하는 내용이다. 금 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거란 황제를 사로잡아 거란은 야율아보기의 건국 후 9대 219년 만에 멸망했다.
  
인종3년(1125년) 고려에서 금에 보낸 국서는 접수가 거부되었는데 국서의 서식이 ‘표(表)’가 아니고 또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은 고려에 대해 거란을 섬기던 것처럼 금을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다. 


고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1126년) 조정회의에서 금과의 관계 설정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금이 야만인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佦俊京)이 “금이 예전에는 소국으로 거란과 고려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거란과 송을 멸망시켜 정치적·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해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鄭應文) 등을 금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이자겸이 변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을 자기 집으로 모시던 때였다. 소위 ‘이자겸의 난’이다. 따라서 고려 측의 대금정책은 이자겸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은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 “표를 올리고 신이라 칭하며 금과의 관계에 있어 모든 절차와 격식을 거란에 대해 했던 예에 따르라”고 했다. 신표(臣表·속국을 맹세하는 글)를 올리라는 것이다. 고려는 금에 사대의 관계를 갖기로 결정한 후에도 서표의 내용을 미진하게 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대한 전환기에 고려가 ‘이자겸의 난’을 맞았고 명분론과 현실론 간에 당파적 대립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종의 리더십은 약화되고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정파 간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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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4-26 17:49
   
1. [[동북9성을 여진에 반환한 지 4년여 후인 1113년 완안부에서는 존장 우야노가 사망하고
동생 아골타(阿骨打)가 그 뒤를 이었다. ]]...???
.
.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역사인물에 대한 정확한 발음표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야노]는 한자음인가요...?? 아골타 역시 한자음의 우리말 발음표기인 것으로 봐서는 역시 그럴 것 같은데..
우야노는 첨 들어보네요! 아골타의 형으로 완안부의 수장은 한자어 우리말 발음표기상으로는
오아속(烏雅束)으로 알고 있습니다.



2.[[이자겸(李資謙)과 석준경(佦俊京)이....]]
.
.
 석준경이 아니라 척준경입니다.
히스토리2 18-04-26 17:57
   
아! 또 오타 ...흑흑  소드마스터 ...척준경
히스토리2 18-04-26 17:58
   
자꾸 죄송합니다....주의해서 적는다고 하는데 우나노도 오아속으로 바꿀께요
뱅기랑 18-07-15 23:11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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