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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5 21:50
[중국] 푸이의 부친 재풍(짜이펑)의 삶 3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418  

7. 짜이펑, 입헌군주제 외치다 ‘황족내각’으로 개혁 찬물

 

 

 

섭정왕 짜이펑의 권력은 장남인 마지막 황제 푸이(왼쪽 넷째 아이)와 마지막 황태후인 융유태후(왼쪽 여섯째)로부터 나왔다. 1909년 봄, 베이하이(北海). 

 

청(淸) 제국은 만주 귀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건립한 왕조였다. 말 안장에서 날을 지새우며 약탈로 먹고살던 민족이다 보니 인구도 적고 문화수준도 낮았다. 인재의 결핍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치적 난제에 봉착할 때마다 한족(漢族) 사대부들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중원(中原)을 차지하기까지, 한족 지식인들의 덕을 톡톡히 봤지만 경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화는 수용해도 피가 섞일까 봐 노심초사했다. 만주 귀족이나 황실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다못해, 만주에서 데리고 나온 개(犬)들도 지들끼리만 어울리게 했다.

 

유럽인들이 상전처럼 모시던 명견을 똥개 취급했다. 개국황제 황태극(皇太極)의 대만주주의(大滿州主義)가 만주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처럼 엄청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 출신 인재들을 중용했지만 절대 믿지는 않았다. 군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매달 받는 봉급도 만주인들과는 차이가 컸다. 만주족 사병이 한족 군관보다 더 많이 받았다.

 

자금성 구석, 한족 관원들은 얼씬도 못하는 밀실(密室)에 만주족 고관들만 수시로 보라고 적어놓은 강희제(康熙帝)의 유훈이 있었다고 한다. “한족 관원들을 신임하지 마라. 이용만 해라.” 

18세기 중엽,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청 제국의 군사력은 바닥이 났다. 이어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민족정책을 대폭 수정했다. 지방의 군 지휘관들을 한족으로 교체했다. 이한제한(以漢制漢), 한족 관리들에게 난의 진압을 위임했다. 
모병과 군비까지 떠넘겼다.

 

군·정의 실권이 태평천국을 평정한 한족 출신 지방세력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난(湖南) 출신 쩡궈판(曾國藩·증국번)이 이들을 대표했다. 군대는 만주황실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쩡궈판 사후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군권을 장악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황실이 군권을 회수하는 듯했지만 신군을 설립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해군대신 짜이쉰은 미국, 특히 뉴욕을 좋아했다. 제27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짜이쉰이 올 때마다 환대했다

 

전국에 널려 있던 8만8000명의 신군 중 7만여 명이 위안스카이가 훈련시킨 북양군(北洋軍)이었다. 북양신군은 보통 군대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의 초빙을 받은 독일군 장교들에게 호된 단련을 받은 최정예였다.

 

북양군은 자신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위안스카이는 알아도 청나라 조정은 알 바가 없었다. 서태후에서 짜이펑으로 이어지는 만주세력은 쩡궈판과 리훙장을 계승한 위안스카이의 상대가 못됐다. 그래도 청 제국은 여전히 만주 귀족들의 천하였다.

개혁, 말은 좋지만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며 온갖 칭송을 받던 개혁가들 거의가 사람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이 희극이 가미된 비극을 연출하며 삶을 마감했다.

섭정왕 짜이펑도 위안스카이를 내쫓자 개혁을 서둘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던 사람답게 신정내각관제(新訂內閣官制)를 반포했다. 각료 13명 중 만주황족이 7명이다 보니 다들 “황족내각(皇族內閣)”이라고 불렀다. 군·정 대권을 만주족들이 장악했다. 

황족내각이 출범하자 짜이펑을 지지하던 입헌파들은 연일 불만을 쏟아냈다. 10년 전, 서태후를 축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행하려다 실패했던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가 특히 심했다. “섭정왕은 배신자다. 입헌에 관심이 없다. 입헌을 구실로 황족집권을 도모했다. 비극을 자초할 테니 두고 봐라.” 

짜이펑의 개혁은 황실의 보존을 전제로 했다. 한계가 있다 보니 믿을 건 혈육밖에 없었다. 짜이타오(載濤·재도), 짜이쉰(載洵·재순), 짜이쩌(載澤·재택) 등 친동생 3명을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탁지부(度支部)대신에 임명했다.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육군대신 짜이타오는 군대와 거리가 멀었다. 경극에는 조예가 남달랐다. 노모가 병중일 때도 경극배우들과 노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병 온 형 짜이펑에게 유명 배우가 배탈 났다며 근심할 정도였다.

 

연병장 사열대를 무대로 개조하고 노래 잘하는 병사들을 우대했다. 3년 후 혁명이 일어나자 융유태후가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짜이타오와 진압대책을 상의했다. 짜이타오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전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 모릅니다.”

해군대신 짜이쉰은 쇼핑광이었다. 외국해군 시찰을 이유로 국내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린 조카가 퇴위하고 형이 섭정왕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뉴욕이나 런던이 베이징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구미 각국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쇼핑에 열을 올렸다. 가까이 지내던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귀국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재정부장 격인 짜이쩌도 형들에 못지않았다. 국고를 주머닛돈 다루듯이 했다. 어려운 친구들에게 돈을 퍼주고 태후의 용돈도 넘치도록 줬다.

낙향한 위안스카이는 은인자중했다. 낮에는 부인들과 소일하고 해만 지면 무전기 앞에 앉아 북양군의 보고를 받았다. 

 

 

 8. 신해혁명의 총성, 위안스카이 운명을 가르다

 

 

 

1910년 겨울, 동방잡지에 실린 위안스카이의 모습. 당(唐)대 산문가 유종원(柳宗元)의 시, 강설(江雪)의 마지막 구절인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외로운 배 위에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노인, 눈 덮인 차가운 강에서 혼자 낚시질하네)을 연상케 한다. ‘파사수조도(坡蓑垂釣圖)’라는 제목이 달린 이 사진은 짜이펑을 안심시키기에 족했다.

 

권력은 위험하다. 더 큰 권력의 비호를 받아야 유지가 가능하다. 권력의 세계는 도박판과 흡사하다. 자신을 몰락시킨 사람을 순식간에 중독자로 만들어버린다. 위안스카이도 그랬다. 대청제국의 권력 체제에 의해 쫓겨났지만 몇 년 후 한배를 탔고, 결국은 제국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위안스카이 축출에 성공한 짜이펑은 후임 직례총독에 돤팡(端方·단방)을 임명했다. 자신감이 생겼던지, 몇 달 후 돤팡의 직위도 박탈해버렸다. 1910년 2월 주중 영국공사였던 조르단(John Newell Jordan)이 본국 외무성에 보낸 ‘1909년 중국정세 보고서’가 남아있다. 

“1909년은 가장 영향력이 컸던 진보적 정치가 위안스카이의 해직으로 시작됐다. 위안스카이 다음가는 자유주의자 소리를 듣던 돤팡의 해임으로 끝을 맺었다. 직례총독부 소재지 톈진의 명사들은 행동으로써 섭정왕 짜이펑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돤팡이 톈진을 떠나는 날 역전 마당에서 성대한 고별 의식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상인들이 나눠준 돤팡의 사진을 보며 위안스카이의 근황을 더 궁금해 했다고들 한다. 짜이펑의 황제놀이는 오래갈 것 같지 않다.” 

관직에서 물러난 돤팡은 잠복해있던 은둔심리가 발동했다. 두문불출, 골동품 수집과 서예, 고대 문자 연구에 매달렸다. 남쪽에서 철도 가설을 놓고 문제가 발생했다. 짜이펑은 일찍부터 유학유술(有學有術), 학문과 술수에 능하다는 소리를 듣던 돤팡을 다시 불러냈다. 특명대신 자격으로 한동안 남쪽에 머물던 돤팡은 귀경길에 위안스카이의 칩거지 펑더(彭德)를 들렀다.


 

섭정왕 취임 1년 전의 짜이펑. 오른쪽이 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살 때 모습. 안겨 있는 어린애는 차남 푸제. 1907년 가을, 순친왕 왕부.

 

위안스카이는 돤팡을 극진히 대접했다. 프랑스 영화까지 한편 돌렸다. 돤팡은 사돈을 맺자고 간청했다. “허락해 주시면 절세의 국보 ‘毛公鼎(모공정)’을 딸에게 딸려 보내겠습니다.” 현재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서주(西周·기원전 11∼8세기)시대의 청동기 모공정은 돤팡의 소장품 중 하나였다.

 

위안스카이는 천하대사라면 몰라도 골동품이나 서화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평소 세상에 없는 보물을 갖다 놔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막료들을 물리치고 장시간 밀담을 나눴다. 담화 내용은 영원한 비밀로 묻혀 버렸다.

위안스카이의 거처에는 방문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는 청나라 황실이 위안스카이의 동향 파악을 위해 보낸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꼭 만나야 할 경우는 환자 행세를 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위안스카이는 당대 최고의 연기자였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동방잡지(東方雜誌)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실렸다. 늦가을 해질 무렵, 도롱이 입고 낚싯대 드리운 모습은 세상사를 멀리한 강태공을 연상케 했다.

 

고향의 아름다운 산수에 파묻혀 고독한 영혼을 달래는 모습은 짜이펑을 안심시키기에 족했다. ‘파사수조도’(坡蓑垂釣圖), 누가 달았는지 제목도 멋있었다. 잡지사 미술담당 기자가 매수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11년 신해년(辛亥年), 새해가 밝았다. 위안스카이는 용하다는 맹인 점쟁이를 불렀다. “중추절이 지나면 관성(官星)이 제 발로 다가옵니다.” 

음력 8월 19일(양력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서 혁명의 총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다음날이 위안스카이의 생일이었다. 측근들과 술자리를 즐기던 위안스카이에게 조선 부인 한 명이 전보를 들고 달려왔다.

 

북양군이 보내온 전문을 읽은 위안스카이는 안색이 변했다. “변란이 났다. 홍양의 난(1850년 홍수전과 양수청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등한시할 수 없다.”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청 황실은 돤팡에게 진압을 지시했다. 돤팡은 미적거렸다. 3년 전 위안스카이의 목숨을 구해준 내각총리대신 경친왕(慶親王)과 협리대신(協理大臣) 나퉁(那桐·나동: 한때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칭화대학 경내에 있는 淸華園 세 글자가 대표작이다)이 위안스카이의 기용을 주장했다.

 

 “남방의 신군이 일으킨 반란이다. 현재 전국의 병력은 13만1800명에 불과하다. 그중 7만5000명 정도가 위안스카이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다하는 북양군이다. 진압할 사람은 위안스카이밖에 없다. 위안스카이를 내세우지 않으면 대청제국은 망한다. 기용하더라도 망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잘하면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섭정왕 짜이펑은 질색을 했다. 융유태후(隆裕太后)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친왕의 사자(使者)편에 호광총독(湖廣總督) 임명장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철부지들은 어쩔 수 없다” 며 웃음보부터 터뜨렸다. 이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리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듭니다.” 

 

 

9. 위안스카이, 북양군 호위 속 총리대신職 수락

 

 

 

섭정왕에서 물러난 짜이펑은 자녀들을 돌보며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아들 푸이가 퇴위하는 날 “다시는 일기를 쓰지 않겠다”는 일기를 남겼다. 정치적으론 무능했지만 지혜로웠다. “하늘이 내게 휴식을 선물했다”며 죽는 날까지 은거한 덕에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어도 별 탈이 없었다. 순친왕부에서 자녀들과 함께한 짜이펑. 연도 미상. 

 

정치의 핵심은 이익의 분배다. 섭정왕 짜이펑(載灃·재풍)은 황족의 이익과 황실의 보존에만 안간힘을 썼다. 황족 중에는 제국을 현대사회로 이끌 만한 정치가가 없었다. 관료들도 수준 이하가 많았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공무원처럼 하기 쉬운 것도 없다. 바보도 다 할 수 있다”며 국고를 충당시키기 위해 관직을 팔기 시작한 다음부터 특히 심했다.

짜이펑의 개혁에 호의를 보이던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도 등을 돌렸다. “젊고 경험 없는 만주귀족들은 속이 좁고 즉흥적이다. 개혁을 외치지만 권력을 이용해 이익만 도모한다. 섭정왕은 성격이 물러터지고 정치가 뭔지를 모른다.” 해외에 있던 쑨원(孫文·손문)도 짜이펑의 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청나라 정부와 개혁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호랑이와 호피 값을 흥정하는 것과 같다.”

섭정왕 짜이펑에 의해 쫓겨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2년8개월간 고향 창더(彰德)에 은거했다. 그 사이 130여 명이 창더를 찾았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찾아온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방문객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사방에 포대(砲臺)가 설치된 은신처를 뒤로 하며 거대한 힘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탕치기는 도둑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보물이 있다고 판단한 당대의 일류 도둑들도 먼발치에서 군침만 흘리다 돌아가곤 했다. 

1911년 10월 10일, 남쪽에서 혁명군이 봉기하자 수도 베이징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섭정왕이 한족(漢族) 도살을 지시했다.” 만주인들에게 눌려 살던 한족들은 대문을 걸어 닫았다.

 

만주귀족들은 재물을 톈진과 상하이의 외국인 조차지(租界)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은 이상적인 피난처였다. 일본 조계의 호텔들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폭등했다. 

위안스카이에게 총독 직을 거절당한 짜이펑은 쉬스창(徐世昌·서세창:위안스카이의 심복, 훗날 총통을 역임했다)을 창더로 보냈다. 위안스카이는 조건을 제시했다. “국회를 개원하고 책임내각제를 실시해라. 정당 설립을 허가해라. 혁명 참가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라. 해군을 포함한 전 군의 지휘권을 내게 위임해라. 군비를 요구하는 대로 지급해라. 이 중 하나라도 불응하면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 

짜이펑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북양군 일부를 혁명군 집결지 우한(武漢)으로 이동시켰다.

10월 30일,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고향을 떠났다. 이틀 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한다는 조서(詔書)를 받았지만 일단 사양했다. 대신 북양군에게 전진을 멈추라는 전문을 보냈다. 혁명세력에겐 화의(和議)를 타진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의 성대한 사열을 받았다.

 

총리대신 직도 수락했다. 융유태후는 짜이펑의 섭정왕 직을 박탈했다. 태후는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짜이펑이 위안스카이로 바뀐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군·정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정국이 어수선하다. 반란군 진압에 황족이 직접 나서야 한다”며 태후를 부추겼다. 군복에 온갖 훈장은 다 달고 있었지만 전쟁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황족들은 직위를 반납했다. 금위군을 지휘하던 짜이펑의 친동생, 짜이타오(載濤·재도)의 동작이 제일 빨랐다. 

위안스카이가 펑궈장(馮國璋·풍국장:북양 3걸 중 한 사람,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대리를 역임했다)을 금위군 총지휘관에 임명하자 관원들이 쑤군댔다. “위안스카이는 살아있는 조조(曹操)다. 청나라 조정도 어쩔 수 없이 기용했지만 잘한 짓은 아니다.”

섭정왕 자리에서 물러난 짜이펑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희희낙락하며 부인 방으로 달려갔다. “후련하다. 집 안에서 애들 안고 놀 생각하니 살 것 같다.” 부인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냐”며 대성통곡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짜이타오의 회고록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형님은 무슨 일이건 우유부단했다. 충직하고 후덕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쓸모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는 말과 같다. 규칙적이고 나대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태평성세라면 모를까, 난세에 국정을 담당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무능한 사람들이 어쩌다 중책을 맡으면 야비한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한다. 형님도 3년만 하고 그쳤기에 망정이지 오래했더라면 무슨 험한 평가를 받았을지 모른다.” 

정계를 떠난 짜이펑은 바깥세상과 담을 쌓았다. 아들 푸이가 일본 군부에 의해 만주국 황제에 취임해도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고, 중공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짜이펑은 철저한 운명론자였다.

 

1950년 겨울 감기에 걸리자 치료를 거부했다. 증세가 악화되자 동생과 자녀들이 아무리 병원에 가자고 해도 “의사와 약 몇 첩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51년 2월, 눈을 감는 날까지 약을 입에 대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도 비슷했다. 간단한 수술이면 완치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작은 칼 한 자루가 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며 버티다가 세상을 떠났다

                                                                                                                               ohyh45 님 블로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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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miky 18-04-25 22:45
   
한국 한자음으로
재중이 아니라,애신각라 -재풍- 입니다.

제목을 고쳐주세요.
히스토리2 18-04-25 22:51
   
음 저도 좀 쓰면서 이상해서 짜이펑이라고 했는데,,,순친왕 재풍 참! 왜 생각이 안났는지...제가 구멍이 많습니다.
히스토리2 18-04-25 22:54
   
음............뭐라 드릴말씀이 그저 창피하네요...... 저도 뭔가 어감이 잘 입에 안맞다고 느꼈는데,,,재중은 영웅재중에서 온건지...참! 아까 왜성에서도 잘못쓰고 인명이 자꾸 오락가락 하네요 ㅠㅠ
     
비좀와라 18-04-26 01:23
   
애신각라도 아이신 교루라 해야 알수 있습니다.

아이신은 애로스을 말하는데 즉 Arrows(화살 - 사랑의 신 = 큐피트)를 말하는 것으로 아이신은 동자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애로스 계열이 쿠빌라이와 아들의 설화에서 나오는 몽골왕실과 화살을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로스 차일드의 유태인 등이 속합니다.

당연히 신라를 말하는 신라라는 말 역시 애로스Arrows를 말하고요. 다시 김수로왕 역시 이 애로스 신화와 연걸 되는데 이를 이대목(2개의 물고기) 이미지와 연결되고 다시 이것이 태극 심볼로 변형 되는 것 이고요.

예족이 가라와 사라로 분리 되는데 이 사라가 바로 (화)살족이 되는 것이고 이 들이 애로스 이면서 신라족이 되는 것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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