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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5 21:48
[중국] 푸이의 부친 재풍(짜이펑)의 삶 2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534  

4. 여차하면 군인 목을 쳐 군기 잡은 위안스카이

 

 짜이펑의 친형 광서제는 네 살 때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다음해인 1876년 자금성에서 황제로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1898년 무술(戊戌)년, 개혁(變法)을 추진하던 광서제(光緖帝)의 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

의 배신으로 96일 만에 물거품이 됐다. 

3년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짜이펑(載沣·재풍)을 독일에 사죄사로 파견했다.

11월 7일, 직례총독(直隷總督)과 북양대신(北洋大臣)을 겸하던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베이징의 

허름한 사찰에서 세상을 떠났다. 

북양신군의 설립자 위안스카이가 리훙장의 직을 계승했다. 광서제의 개혁을 좌절시킨 지 3년 만이었다. 독일에 있던 짜이펑은 빌헬름 2세로부터 리훙장의 사망과 위안스카이의 근황을 들었다. 

짜이펑이 듣는 둥 마는 둥하자 빌헬름 2세가 충고했다.

 “네가 군기대신이라니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신하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군대를 장악해야 한다. 10년 전에 비스마르크를 내쫓았다. 군대가 나를 추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 청나라는 황권이 약하다. 힘없는 것들이 평화주의자 행세를 한다. 귀국하면 군 지휘관을 황족 출신으로 교체해라. 황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제야 짜이펑은 진땀을 흘렸다. 18세, 소년도 청년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본 게 많다 보니 긴장할 만도 했다. 독일 황제의 말대로라면 위안스카이의 천하는 시간문제였다.

귀국한 짜이펑은 서태후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개혁의 개 자도 꺼내지 못했다. “책이 제일이다. 아무 일도 없으면 신선이나 다를 바 없다”는 글귀를 벽에 걸어놓고 책에 묻혀 살았다. 해만 지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면 태양을 야속해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위안스카이와는 딴판이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특징이 있다. 꼼꼼함이라는 기본기 외에 바르고(正), 사악하고(邪), 밝고(明), 어두운(暗) 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머리구조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몇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위안스카이도 그랬다.

생전, 사후를 막론하고 “음모가, 나라를 도둑질한 도둑놈, 위대한 개혁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공화주의자, 황제를 꿈꾼 몽상가”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저주와 찬양을 동시에 들었다. 짜이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청나라의 외교권과 북방의 군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개혁을 시작했다. 군대부터 틀어잡았다. 

위안스카이가 신군 훈련을 시작하기 전까지 청나라 군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군인들의 행진 대열은 가관이다.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들은 정말 볼만하다. 어깨에 길다란 총들을 멨지만 자세가 제각각이다. 실탄도 없는 것 같았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이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위안스카이는 신군들에게 참율18조(斬律十八條)를 반포했다. 

“진지에서 고개를 뒤로 돌리는 사람, 전쟁터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 한밤중 행군에서 낙오하는 사람, 고향 타령해대며 패거리 짓는 사람”은 무조건 목을 쳤다. 순식간에 군기가 잡혔다.

 

런던타임스에 “위안스카이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군사개혁가다.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군대의 결점을 짧은 시간 동안에 뜯어고쳤다.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주둔한 덕에 이름 없는 작은 마을들의 명칭이 구미 각국의 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노(老)제국의 외교권과 북방의 군대를 움켜쥔 위안스카이의 개혁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조건 숨겨 두기만 하던 중국인들의 금전관을 바꾸기 위해 은행 건립을 추진했다. 

중국 최초의 국립은행이 문을 열었다. 전당포 주인들의 불평도 간단히 처리했다. 몇 사람 목이 떨어져 나가자 끽 소리도 안 했다.

 

동시에 교육기관 설립도 서둘렀다. 광서제의 개혁 실패로 문을 닫았던 톈진대학당(天津大學堂)이 베이양대학당(北洋大學堂)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천 년간 내려오던 과거제도는 폐지시켰다. 호구조사도 실시했다. 2년이 걸렸다.

거리에 가로등을 세우고 전차도 개통시켰다. 밤거리가 밝아지고 전차가 거리를 질주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폐단이 발생했다. 전국의 유명한 도둑들이 “밤이 대낮처럼 환해서 일하기에 편하고, 낮에는 도망치기 편하다”며 톈진으로 몰려들었다. 위안스카이는 도둑만 전문으로 잡는 군대를 따로 만들었다. 경찰의 탄생이었다.

1908년 1월, 뉴욕타임스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매일 새벽 5시에 업무를 시작해 밤 9시가 돼야 휴식에 들어가는 사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일세를 풍미하던 경륜가들도 그 앞에만 오면 고개를 숙인다.”

그해 겨울, 짜이펑의 아들 푸이가 황제에 즉위하고 짜이펑은 섭정왕이 됐다. 위안스카이는 죽은 광서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럴 때는 36계가 상책이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선땅에서 제일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목숨도 건지고 출세의 발판을 만든 적이 있었다. 



   

5. 위안스카이 돈 먹은 만주귀족, 짜이펑 결단에 반발

 

 

섭정왕 짜이펑에겐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오른쪽이 장남인 마지막 황제 아이신제뤄 푸이(愛新覺羅 溥儀). 왼쪽은 차남 푸제(溥傑). 

 

서태후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보호막이었다.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나 다름없는 짜이펑과 황족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매일 아침 궁궐 문턱을 밟을 때마다 혈혈단신, 지옥문을 들어서는 것 같았다.

 

훗날 친구 쉬스창(徐世昌·서세창, 위안스카이 사후 4년간 총통 역임)에게 당시의 심정을 말한 적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붙잡고 미사여구를 늘어놨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해대는 입바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장 베이징을 떠나고 싶었지만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워낙 의심 많은 종자들이라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몰랐다.”

위안스카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어사(御史) 장춘린(江春霖·강춘림)이 위안스카이 제거를 주장했다. “골육을 모함하고, 사사롭게 패거리를 만들어 조정을 농락했다. 빨리 퇴출시키지 않으면 무슨 변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힘들다.” 골육을 모함했다는 말은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다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짜이펑의 형 광서제의 비극을 의미했다. 

해외 망명 중이던 캉유웨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짜이펑에게 상소 형식의 서한을 보냈다. “선제(先帝)의 상(喪)은 뭔가 석연치 않다. 위안스카이는 예전에도 역적이었고 지금도 역적이다.”

 

1898년, 무술(戊戌)년에 이화원을 포위해 서태후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모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흉악한 모의를 한 적이 없다. 위안스카이가 선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하루빨리 죽여 없애야 한다.” 

궁궐 안에 “위안스카이 처형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궁궐 안에서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 집 앞에 친구와 부하들이 확인을 하겠다며 몰려들었다. 톈진의 북양신군 주둔지에도 자동차와 마차들이 쉴 새 없이 군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전운이 감돌았다. 

10여 년간 위안스카이는 돈과 칼로 사람들을 관리했다. 정적들에겐 가혹했지만 만주귀족들에겐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돈을 싸들고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줘서 싫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한쪽이 겁이 나면 다른 한쪽도 겁이 나기 마련, 안절부절못하기는 짜이펑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을 둘러싼 신건육군(新建陸軍)은 모두 6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5곳이 위안스카이의 부대였다. 동북3성과 직례(直隷·지금의 하북성), 산둥(山東)의 총독이나 순무(巡撫)도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이었다.

짜이펑이 주저하자 위안스카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황족 한 사람이 짜이펑에게 경고했다. “위안스카이가 두려워한 사람은 서태후가 유일했다. 이제 위안스카이의 안중에는 아무도 없다. 세력이 더 커지면 제거하려야 할 방법이 없다.” 어사들도 짜이펑을 압박했다.

 

 “위안스카이가 섭정왕을 내쫓고 융유태후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실시하려 한다.” 짜이펑은 그제야 위안스카이 제거를 결심했다. 융유태후는 형 광서제의 부인이었다. 권력에는 형수고 뭐고 없었다. 

짜이펑은 모순덩어리였다. 위안스카이를 죽여버리자는 의견에 동조했지만 “일국의 대신을 죽이려면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며 명분을 찾는 데 골머리를 싸맸다. 무술년의 밀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가 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의 돈을 받아먹은 사람 거의가 만주귀족이다 보니 부패로 옭아넣을 수도 없었다. 

매사에 우유부단하던 사람이 결단을 내리면 희극을 연출하기 십상이다. 짜이펑은 군기대신(軍機大臣)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군기대신은 경친왕(慶親王), 장즈퉁(張之洞·장지동), 루촨린(鹿傳霖·녹전림) 외에 짜이펑과 위안스카이, 모두 5명이었다. 위안스카이는 당사자이다 보니 참석 자격이 없었다.

경친왕은 황족 중에서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가장 많이 받아먹은 장본인이었다. 평소 장즈퉁은 위안스카이를 “학문이 없고 술수만 뛰어나다”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충돌도 잦았다. 짜이펑은 장즈퉁과 루촨린이 자신을 지지하리라고 의심치 않았다. 

회의가 열리자 경친왕은 대성통곡했다. 당황한 짜이펑은 장즈퉁에게 눈길을 줬다. 위안스카이의 처형을 반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군주가 어리고, 국가는 위기에 처했다. 정국도 불안하다.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우리 손으로 만리장성을 허무는 것과 같다. 황제와 태후의 시신이 아직 식지 않았다.” 황제나 태후가 세상을 떠나면 100일 동안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장즈퉁의 발언이 끝나자 경친왕이 통곡을 그쳤다. 이를 악물고 쏘는 듯이 내뱉었다. “위안스카이의 처형을 허락할 수 없다. 신건육군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거냐.”

회의 당일 아침,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을 떠날 채비를 했다. 허름한 복장에 싸구려 모자를 눌러쓰고 둘째 부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톈진(天津)행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6. 위안스카이, 궁궐 마당서 석고대죄 후 낙향

 





1912년 1월, 위안스카이에게 권좌를 내준 짜이펑은 1924년 가을 장남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자 자녀들과 함께 한동안 톈진으로 이주했다. 톈진 시절의 짜이펑과 자녀들.[사진 김명호]



짜이펑이 집권한 베이징은 사지(死地)나 다름없었다. 3등 객실에 앉아 본거지 톈진으로 향하던 위안스카이는 인생무상을 실감했다. 배웅 나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서는 사람을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 

아직도 중국인들이 황제의 스승(帝師)감이었다고 일컫는 양두(楊度·양도)였다.

양두는 일본 유학 시절 쑨원(孫文·손문)과 가까웠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건설이 폭력보다 위대하다. 때려 엎을 재주는 있을지 몰라도 건설할 능력은 없는 사람”이라며 쑨원을 멀리한 다음부터 위안스카이에게 희망을 걸었다. 위안스카이도 한눈에 휘호를 선물하며 호감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감격이 극에 달한 위안스카이는 훌쩍거렸다. “모든 사람이 피하는 나를 배웅 나오다니. 빨리 들어가라. 무슨 모함을 당할지 모른다.” 양두는 태연했다. “천하의 위안스카이와 작별인사 나누는 사람이 나 혼자라니, 이런 영광이 없다.”

믿었다가 손해 보는 적은 있어도, 의심해서 탈 나는 법은 거의 없다. 위안스카이는 톈진까지 가지 않았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톈진의 측근에게 데리러 나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옛 부하가 베이징의 최신 소식을 소상히 설명했다.

 

“섭정왕이 마음을 바꿨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낙향시키자는 장즈퉁(張之洞·장지동)의 설득이 주효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막혔던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장즈퉁과 짜이펑의 얼굴이 눈앞에 오락가락했다.

 

 

1912년 3월, 임시대총통 취임 선서를 마친 위안스카이. 오른쪽 셋째가 양두(楊度).

 

정신이 돌아온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만류하는 측근을 타일렀다. “돌아가서 조정에 무릎 꿇고 빈 다음 다시 오마. 지체하면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다음엔 톈진역으로 나와라.”


베이징으로 돌아온 위안스카이는 궁궐 마당에 석고대죄했다. 내시 한 명이 짜이펑의 조서를 들고 나타났다. “위안스카이는 건강을 많이 해쳤다. 다리에 질병이 특히 심하다. 고향에 돌아가 병을 다스려라.” 멀쩡한 다리 절룩거리며 궁궐 문을 나선 위안스카이는 3일 후 다시 베이징을 떠났다.

톈진행 특등 객실에서 묘한 분위기의 중국 승객을 발견한 영국인 작가 한 명이 훗날 기록을 남겼다. “건장한 수행원들을 거느린, 작은 중년의 중국인이 앞자리에 앉았다. 소복 차림에 침통한 모습이었다. 신문을 펴 들었지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인지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제국의 황량한 토지와 고목의 그림자가 신비로운 승객의 얼굴을 스칠 때 전율을 느꼈다. 수행원들이 차와 음식을 들고 오는 바람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틈을 타서 검표원에게 앞에 앉은 승객이 누구냐고 영어로 조용히 물었다.


제국의 군기대신 위안스카이라는 말을 듣자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섭정왕 짜이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나돌던 위안스카이는 열차가 톈진에 도착하기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자신이 내친 사람에 의해 짜이펑은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위안스카이는 톈진의 독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직례총독은 위안스카이의 직계였다. 총독부 뒷마당의 별채에 거처를 마련했다. 보안 유지를 위해 가족과 하인들의 외부출입을 금지시켰다. 멋모르고 밖에 나가려 했던 친척 한 명은 목이 달아났다.

예금을 인출한 위안스카이는 부인들을 톈진으로 불러모았다. 한두 명이 아니다 보니 모두 도착하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다. 동작 느린 부인들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톈진을 떠나는 위안스카이의 짐은 단출했다. 특이한 것이라면 장정 두 명이 낑낑댈 정도로 무거운 상자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 안에 무전기가 들어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위안스카이는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시의 중국인들 중에서 통신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친 사람이었다. 무전기만 있으면 어디 촌구석에 박혀있어도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는 신건육군을 통솔할 자신이 있었다.


고향인 허난(河南)성 샹청(項城)에는 어렸을 때부터 위안스카이만 보면 무조건 쥐어박던 형님이 있었다. 북양대신과 직례총독은 물론이고 군기대신에 오른 후에도 무시하는 건 여전했다. 남들은 절절 기는 동생에게 아쉬운 소리 한마디 한 적 없는 무서운 형님이다 보니, 근처에 갔다간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몰랐다.

 

위안스카이는 이웃마을 펑더(彭德)에 안착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말이 좋아 이웃마을이지 형님을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다.

위안스카이의 낙향 소식을 들은 짜이펑은 요직 개편을 단행했다. 친동생 두 명을 해군대신과 육군대신에 임명하고, 도처에 박혀있던 위안스카이의 수족들을 잘라버
렸다.


                                                                                                                           ohyh45 님 블로그 참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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