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몽진했다가 평양에 진군한 일본군이 북상할 경우 명나라에 망명을 하려했던 선조 임금은 명나라 사신이나 장군만 만나면 넙죽넙죽 큰절을 올리곤 했다. 물론 당시 예법 상 사신이 황제를 대신하는 공식행사인 경우에는 당연이겠지만, 선조 임금은 명나라 사신/장군만 만나면 큰절을 올리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표적인 기록을 인용하겠다.
1. 선조 26년(1593) 8월 14일 을미 (제목) 제독을 접견하여 남쪽의 적세, 방어책을 논하다
“이 제독과 양 부총이 황주에 이르니, 상이 제독에게 두 번 절하자 제독도 답배했다. 상이 또 양원에게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했다. 상이 ‘우리나라가 대인의 은덕을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군신이 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감사의 절을 올리겠소이다.’라고 말하니, 제독이 ‘사배(謝拜)는 그만두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은 ‘황은이 하늘과 같으니 대인께 사배하겠소이다. 만약 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 어찌 오늘이 있겠소이까.’라고 말하고, 상이 승지를 시켜 제독에게 ‘국왕께서 배례(拜禮)한 뒤에 삼고두(三叩頭)하고자 합니다.’라고 고하게 하니, 제독이 ‘이것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상이 제독 앞으로 나아가 재배하고 삼고두하니 제독이 답배했다. 상이 다시 양원 앞으로 나아가서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하였다.”
2. 선조 26년(1593) 11월 9일 (제목)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하다
“상이 4번 큰절하는 예를 거행하고 또 전(殿)으로 올라가 꿇어앉으니, 도사가 나아가 선유첩을 펴 놓았다. (중략) 상이 허리를 구부리고 엎드려 머리를 두드리고 전(殿)에서 내려와 4번 큰절을 올렸다. 이어 도사에게 전 위로 함께 올라가기를 청하여 상이 두 번 절하고 읍(揖)했다. 도사가 답배하기를 청하니, 상이 ‘감히 감당할 수 없소이다.’라고 말했으나, 도사가 한사코 요구했으므로 드디어 답배하게 했다.
3. 관전현에 유배 당할 처지가 되다 (재업)
만주의 관전현 위치
명나라로 가려는 선조의 계획은 평양을 떠날 때부터 구체화됐다. 그래서 평양에 있을 때는 유몽정을, 숙천에 머무를 때는 이덕형을 각각 명나라로 보내 회신을 기다렸다.
조선을 떠나려는 임금과 이를 막으려는 대신들의 기싸움은 팽팽하게 맞섰다.
마침내 6월 26일 명나라로부터 소식이 왔다. 갈등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내용은 요동의 변방 군사주둔지인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조선의 임금을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수용인원도 100명을 넘지 못한다고 명나라는 못을 박았다.
선조는 크게 실망했다. 명나라 땅에서 제후처럼 살겠다는 계획이 일장춘몽처럼 깨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혹시나 싶어 알아본 관전보라는 곳은 압록강 너머 만주벌의 벽촌이었다. 국경인 의주에서 동북으로 200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대신들은 수군거렸다. 사실상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에 조선의 임금이 갈 수 있느냐면서 혀를 찼다. 일부는 그곳이 포로나 죄인들이 머무르는 곳이라며 분개했지만, 속으로는 잘됐다며 반겼다. 아무리 임금이 멍청이라도 제 발로 그곳에 가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명나라 북경의 조정은 조선 임금의 망명 의사를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임금이라는 자가 싸울 생각은 않고 자신만 도망가서 살겠다는 발상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이 가짜라는 설이 한때 나돌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가짜가 아닌 진짜로 판명된 이후에는 지능지수가 모자란 얼간이나 바보로 여기게 됐다.
당시 명나라로서는 남의 나라인 조선에 대군을 보내 왜군과 싸울 여력이 없었다. 설혹 대군을 보낸다고 해도 멍청한 조선 임금의 행태를 볼 때 명나라 군사만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나온 계획이 조선의 임금을 명나라 변방으로 유배시키는 것이었다. 대신 세자인 광해를 임금으로 삼아 재정비하는 방안이었다.
때마침 조선의 세자인 광해가 분조를 이끌고 왜군과 맞서 싸우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조를 폐위시키려는 명나라 조정의 의중과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이제 조선 땅에서 왜군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명나라의 시선은 광해의 분조에 쏠려 있었다. 조선의 실질적인 임금이 선조가 아닌 광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선조는 며칠을 고민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막상 외진 유배지와 다름없는 곳으로 가려니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미 임금으로서 체면이나 위상이 땅에 떨어진 마당이었다.
다시 슬그머니 조선 땅에 머무른다는 것도 대신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과인은 여러분의 뜻을 헤아려 명나라로 가지 않겠소. 대신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국정을 돌볼 터이니 처소를 새로 짓도록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