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실증사관은 일제강점기 당시 19세기 일본의 실증사관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 흐름으로 사료 비교대조 및 비판,·해석을 강조하는 역사연구이다. 대표적 학자는 이병도(李丙燾), 김상기(金庠基), 이상백(李相伯)등이다.
* 사실 사료의 교차비교도 중요하지만, 정황이나 유물이나 유적을 찾는 작업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 생각한다. 일반인이 하기에 여건의 한계는 있지만 (즉, 일반인 소위 향토사학자들은 그래서 가설을 제기하고 학계가 이 것에 대해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역사연구 시스템 도입이 중요하다) 사서의 교차비교 역시 우리의 사서가 없는 상황에서 한계를 가짐은 분명한다. 대충 여기다 라고 추정하기 보다는 일단은 정황적 상황을 제기하고, 지리적 통찰과 통계학 유적발굴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객관화 해야
진정한 실증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한국은 사학도 중요하지만, 1)문화인류학이나 2)고고학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시급한다고 생각을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활약한 한인 실증사학자들은 주로 일본 대학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주관적 해석, 특정 사관을 배격하고 자료 그대로의 해석 및 비판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연구는 정확도가 높다는 평을 받았지만, 동시에 식민사관의 영향도 받아 민족사적인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학풍을 따라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들은 1934년 진단학회를 만들어 일본인 역사학자들과 학문적 경쟁을 했으나, 진단학회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사실상 일본식 식민주의 역사 방법론을 담습한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 해방이라는 특수한 관점에서 역사를 비판, 연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진단학회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에서 주관은 왜 필요한가? 흔히 일반인들은 역사가 사실들들의 연속된 나열이며, 저절로 구성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에는 반드시 사관(혹은 국가적 주관)이라는 것이 있어서, 역사를 구성한다(모든 시간과 사건이 역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사관의 역할이다). 그래서 역사는 객관적인 법칙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역사기술자의 관점과 선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실증사학이라는 말을 통해, 마치 자신들이 구성한 식민사관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어서 고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사실처럼 주입해왔다.
역사는 여러 사건의 구성과 선택의 혼용물이다.
역사는 역사를 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역사가)이 사실과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고, 그 연결의 이면에는 일관성 있는 관점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해석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학계가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바라보는 한국사의 관점은 무엇인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고대의 사료가 부족한 점 b)같은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 점 c)같은 지명이라도 변하고 이동한 점(소위 교치) 그리고 d)고유명사와 보통명사가 혼재된 점(평양과 서울) 등을 이용해 한국의 역사가, 처음부터 한반도 안에서만 벌어진 것처럼 조작하는 관점에 의해 한국사의 스토리를 구성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오래된 고대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처럼 해석했고,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반론에 엄격했다.
한국의 실증사학자들은
1)"마치 역사가 자연과학적 사실처럼 그렇게 실증적으로 있는 것처럼 오도"하였고,
2)실증사가 라고, 주장하는 자신들이 구성한 한국사의 이야기줄거리를 마치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역사적 경전처럼, 그들이 양성한 사학자와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역사 관리를 해왔다.
결국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올가미가 되었던 것이었다.
소위 실증사학을 학습한 이들은, 이미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줄거리를 고치지 못하게 못박아놓았다
독일의 근대사학자 랑케가 말하는 실증주의 사학은, 역사학의 사료와 사실을 확보하는 데는 다소 기여했지만 역사학 본래의 역사서술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는 여러 문제와 한계가 있음이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비판받은 바 있다.
그런데도 지금도 우리역사학계는 실증사학을 빌미로, 우리 스스로 쓰는 한국사의 다른 이론(즉 반론)은 무조건 외면하고 있다.
소위 실증 사학자들은 저들의 사관에 맞는 사료가 나오면 침소봉대하고, 위배되는 사료가 나오면 함부로 폄하하고 무시한다.
결국 오늘의 한국사에는 한국사가 없고, 일제시대 부터, 객관화로 포장된 축소지향적 자칭 실증사가들만 보는 한국사만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조에 올라가면 중국에 대한 사대관 까지 있었다.
축소지향적 실증사관과 함깨 중국식 사대사관은 한민족의 고대사를 축소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사는 일본식 실증사관과 중국의 사대사관에 의해 동서에서 협공당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사는 항시, 한국의 지정학적인 위치(사서+유물과 유적 +정황)와 함께 당시의 국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학은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현재의 학문이다.
역사가 항상 새롭게 쓰여 져야 하는 이유는 그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관점의 해석학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증 운운하면서 역사를 특정시각에 제한하는 일은 역사적 폭력이다.
우리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실증사학은 실증(정작 실증도 아니다)이 마치 어떤 절대적인 관점인 것처럼(자연과학의 이론처럼) 주변국가의 사관에 종속된 것은 역사적 주관 을 가지지 못한 우리 자신의 문제이지, 중국이나 일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소위)실증사관이나 사대사관은 일본이나 중국의 잘못이 아니고, 순전히 우리의 잘못이다. 역사적 반론(즉, 대륙사관 등) 역사학계가 거의 수용하지 못한 탓이다.
이것을 두고 일본이나 중국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느니, 중국이 우리 역사를 축소했느니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는 우리의 민족사를 당당히 쓰고, 반론에 대해서도 오픈된 마인드을 가지면 된다.
한국의 실증사학은 문헌고증과 비판에서도 실지로 과학적이지도 않으면서 과학성을 표방하면서 역사를 독점하고, 그것에 파생되는 사회적 지위(대학교수와 연구소의 연구원)와 이익(월급과 연구비)을 독점하며, 모든 자원을 착취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자연과학적 기술과 지식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고고학도 이러한 실증사학에 합류하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고고학적 결과마저도 문헌사학의 고압적 자세와 자의적 해석으로 뒤집는다.
오늘의 역사학자나 역사기술자들은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쓸 때의 사관 보다 오히려 후퇴한것 처럼 보인다. 역사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