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과 함께 당시 실권자인 환관 왕진이 이끌고 출정한 명나라군이 무려 50만 대군에 달했는데...
4만 규모의 오이라트군에게 영종은 포로로 잡히고, 왕진과 병부상서 이하 주요수뇌부들이 전사-피살되고
50만 대군 또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으니...
비록 예전 몽골제국의 위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몽골기병의 위력은
가공할 만 합니다.
이 당시 오이라트는 기세를 몰아 북경을 포위했음은 물론(결국 우겸의 철통같은 방어전략에 의해 철수하지만..)
서쪽으로는 신강과 중앙아시아 일부지역까지, 동쪽으로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 중서부를 공략하여
해서여진-건주여진에게까지 큰 타격을 가하고... 이는 당시 조선에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세종말년~문종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이 에센-오이라트의 위협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고... 당연히 평안도-함경도의 북방방어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에센의 오이라트가 명나라와 여진을 공략하던 당시... 조선에도 서신을 보내 예전 몽골-고려관계를 언급하며
함께 명나라를 도모하자는 동맹제의까지 한 것으로 아는데...당시 세종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상상이기는 하지만... 당시 조선이 꼭 오이라트와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에센이 명나라와 여진족을 공략하여 힘이 약화된 틈을 타 요동을 공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영종이 포로로 잡히고 북경이 공격받는 위급한 상황에서 한때 명나라가 조선에게 요동으로 출정해 달라고
구원요청한 경우도 있었으니.....(몰론 조선이 이것을 구실로 요동을 차지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곧바로
구원요청을 철회하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