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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5 15:18
[한국사] 한국전쟁의 숨은 Boss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201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하여 한국전쟁(6 ‧ 25전쟁)을 일으켰다. 민족통일과 민중해방, 그리고 사회주의체제의 실현이 그들이 내건 전쟁 명분이었다.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는 군인 250만 명(중공군 포함), 민간인 250만 명 합계 500만 명에 달했다. 물적 피해는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이러한 참화를 초래한 한국전쟁은 누가 주도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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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세력과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세력 간의 냉전은 한반도를 분단으로 몰고 갔다. 오랫동안 하나의 국가로 존속했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면 통일을 향한 복원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남북한 모두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가운데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년)과 김일성(金日成, 1912-1994년)은 모두 통일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에게 북진통일의 철회를 요구하였고, 이승만은 1949년 2월 미국에 대해 북진을 감행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강력한 무력통일 의지를 가지고 스탈린의 지원하에 실제로 이를 추진해나갔다. 1966년에 소련 외무성이 작성한 한국전쟁 관련 보고서에는 김일성과 다른 북한 지도자들이 1948년 초부터 평화적 통일 제안을 무시하고 군사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I. V. Stalin, 1879-1953년)과 김일성의 회담이 있었으며, 3월 17일 양국 간에 경제협력, 기술원조, 차관, 원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소경제문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朴憲永, 1900-1955년)이 참석한 비밀회담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제안하였으나, 스탈린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지 않고, 주한미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어 미군이 전쟁에 개입할 우려가 있으며, 중국의 내전이 진행 중이어서 공산세력의 전력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제적 ‧ 국내적 여건이 남침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스탈린은 남한군이 먼저 38도선 이북으로 공격해 오는 경우에 한해서만 남침이 가능하다고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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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주한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8월 12일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T. F. Stykov, 1907-1964년)에게 남침에 대한 소련의 승인과 지원 여부를 타진했다. 슈티코프는 3월에 있었던 스탈린의 지시를 거론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8월 14일 김일성은 서해안 옹진반도를 점령하는 제한적인 남침을 제안하였다. 옹진반도는 북한군이 개성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는 경우 북한군의 우측으로 돌아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9월 24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명의로 전문을 보내 다시 한 번 김일성의 남침의지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므로 남침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남한 내에서 게릴라활동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1949년 10월 14일 북한군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참여한 가운데 38선(북위 38도선) 부근에서 대규모 분쟁을 일으켰다. 10월 27일 슈티코프의 잘못을 비판하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결정이 평양으로 하달되었다. 11월 3일 소련 외무차관 그로미코는 슈티코프에게 스탈린의 지침을 강력하게 이행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로미코는 이 전문을 통해 정치국에서 슈티코프의 징계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었으며 정치국의 지시를 벗어나는 어떠한 행동도 용납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의지에 다시 고삐를 채운 것이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무기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이어서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67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까지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소련은 유럽에 보다 집중하고 중국은 아시아에서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한다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2월 14일 소련과 중국 간에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다. 핵무기를 가진 공산 종주국 소련과 공산 신흥대국 중국의 결합은 힘의 균형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아시아지역에 소련, 중국, 북한 3개국이 연합한 거대한 공산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나선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한반도의 적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였을까?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한 대소 봉쇄정책을 실시하였다. 한반도의 38선도 처음에는 단순히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편의적인 구분선에 지나지 않았으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대소 봉쇄선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38선을 침범함으로써 미국의 대소 봉쇄선을 허물어뜨리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의 위신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다음으로 제정러시아 당시부터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한반도의 완전 적화에 성공하면 인천, 부산, 제주 등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었다. 한반도를 교두보로 일본에 대한 대규모의 침투와 교란행위를 감행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미국 일변도의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9일 슈티코프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김일성은 북한의 무력남침계획과 관련하여 스탈린을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이승만의 군대가 북쪽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그 공격에 반격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승만은 지금까지 공격을 가해오지 않고 있으니 통일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승만의 공격이 있으면 이를 명분으로 남침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승만이 공격하지 않으니 김일성이 답답하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승만의 북침설이나 38선 부근에서의 상호충돌로 인한 전쟁발발설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슈티코프에게 전문을 보내 “김일성이 남한 해방에 관한 회담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나 이야기할 의향이 있다. 이 뜻을 김일성에게 전하고 그를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처음으로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승인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어서 이 전문은 “마오쩌둥 동지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의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를 도울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당시 모스크바에 체재하고 있던 마오쩌둥과 협의했다는 것이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비공개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마오쩌둥의 동의를 조건으로 남한에 대한 선제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제 중국이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세력들에 대한 도전을 더 망설일 것이다. 미국에서 오는 정보들에 의하면 미국 내에서도 타국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유럽에서의 위상이 강화됨으로써 이런 불개입 분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해방의 찬반을 다시 한 번 따져봐야 한다. 첫째 미국이 개입할지 여부를 검토하고, 둘째 중국 지도부가 이를 사전에 승인하는 경우에 한해 해방작전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김일성과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김일성은 미국이 대규모 전쟁을 원하지 않으므로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설사 미국이 개입할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 개시 후 1개월 이내에 남한 점령을 완수할 수 있으므로 미국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일본에 주둔 중인 미군 4개 사단이 개입하는 정도로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에 부족하고 미국 본토의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려면 1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 역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에 근거해서 미국 개입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에도 대비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즉 미국이 개입하면 마오쩌둥의 중국으로 하여금 대처하도록 조치하였다. 만약 중국과 미국이 충돌한다면 중국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을 직접 압박하는 한편 김일성으로 하여금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군이 중공군을 격파하고 만주지역까지 진출할 경우에는 중소동맹에 근거해서 직접 소련군을 투입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만, 미군이 만주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미국이 만주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은 것이 제3차세계대전을 막은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보여준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마오쩌둥을 방문하여 스탈린의 지시사항과 함께 3단계 남침전략을 설명하였다. 1단계로 38선 근처의 병력 증강 및 집중, 2단계로 남한에 평화통일 제의, 3단계로 남한이 이 제의를 거부하면 남침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조선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와 그의 동료들은 변화된 국제정세로 인해 통일사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그들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 회담에서는 그 문제가 궁극적으로 북한 동지들과 중국 동지들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성질의 것이며 만일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논의가 있기까지 그 문제의 결정은 유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스탈린의 의사를 확인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하면서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병력을 파견하여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회담 결과가 스탈린에게 보고됨으로써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 사이에 순차적으로 남침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왜 타이완 해방을 뒤로 미루고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하고 지원을 약속하였을까? 당시 미국은 중국이 무력으로 타이완을 점령할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타이완 점령을 승인하고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타이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해군력과 공군력이 필요한데, 중공군의 해군과 공군은 매우 취약해서 소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9년 7월 11일 류샤오치(劉少奇)와의 회담에서 마오쩌둥의 요청을 거부했다. 소련이 해군과 공군을 동원할 경우 소련의 참전사실을 은폐하기 어렵고, 이는 미국과의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져서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의 승인과 협조 없이는 타이완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신생국으로서 소련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였으므로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A. B. Vasiliev)의 지휘 아래 1950년 5월 29일 전쟁계획과 북한군 운용계획이 수립되었다. 6월 1일 부대 편성이 완료되고 6월 15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마련되었다. 이 계획은 6월 16일 슈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으며 공격일자는 6월 25일로 정해졌다. 첫 공격은 6월 25일 새벽에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서해안을 집중적으로 타격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장악하며 동부지방에서는 춘천과 강릉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21일 김일성은 38선 전 지역에서 동시에 공격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북한군의 군사작전은 1개월 동안에 3단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단계는 남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주력부대를 섬멸하는 단계로서 3일 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 원주, 삼척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2단계는 남한군의 증원 병력을 격멸하고 전과를 확대하는 단계로서 군산, 대구, 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3단계는 남해안까지 진출해서 남한군의 잔적을 소탕하는 단계로서 부산, 여수, 목포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남한 전역을 점령하고 통일된 공산정권을 수립한 후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 기념식을 서울에서 거행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은 북한군이 서울지역을 점령한 후 정치협상을 통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제한전을 계획하였으나, 미군이 참전하면서 남한 전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내전으로 그칠 수 있었던 전쟁이 미국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을 보면 이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6일 슈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낸 보고서에 북한군의 남침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민군은 38선 지역에 6월 12일 집결을 시작하여 6월 23일 완료했습니다. 각 부대의 이동은 조직적이었고 의외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각 사단의 작전계획 작성과 지형정찰 과정에는 모두 소련 고문관이 참여했습니다. 전투를 위한 모든 준비는 6월 24일에 완성되었으며, 이날 각 사단장에게 공격 개시일과 시간에 관한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 각 부대는 6월 24일 24시 공격 출발 진지로 진입했습니다. 군사행동은 현지시간 04시 4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 공격이 시작된 지 3시간 후 각 부대와 군단은 3-5 킬로미터 추진하였습니다. 인민군의 공격은 완전히 기습이었습니다. 남한군은 겨우 옹진, 개성, 그리고 서울 방향에서 완강한 저항을 할 뿐이었습니다. 비교적 조직적인 저항은 12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과 지원 없이 남침을 감행할 권한이나 능력이 없었다.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고 훈련받은 자로서 나에게 있어 스탈린 동지의 지령은 법과 같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침략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에 의한 통일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이를 위해 내부역량과 군사력을 강화하고, 집요한 노력으로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내고, 마침내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실행한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의 주도자로서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국제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김일성의 남침의지를 통제하면서 활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건이 성숙되었다고 판단되자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하였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우려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에는 마오쩌둥의 중공군으로 하여금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중공군을 격파하고 만주지역으로 넘어오는 경우에는 소련군을 직접 투입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만주지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계대전도 불사한다는 각오였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숨어 있는 상태에서 김일성을 앞세우고 마오쩌둥을 뒤세워서 미국의 자유세계에 대한 방어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 연세대학교 교수 박명림은 한국전쟁 당시의 스탈린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최고의 결정권을 갖고 있었고, 동의를 통해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주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양도를 통해 2선으로 물러섬으로써, 그리고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최초의 의도를 은폐함과 동시에 최초의 행태를 지속했던 것이다. 한 소련 탈주자가 정확하게 말했던 것처럼 스탈린은 한마디로 뒤에서 조종하고 결정하는 ‘숨은 보스(hidden boss)'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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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미 18-04-15 16:03
   
매울 때는 토마토주스......
     
아티파이어 18-04-15 18:47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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