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1) 남북국(南北國)은 남한과 북한이 아니라 신라와 발해이다. 남국은 신라이고, 북국은 발해를 말한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784년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한 실학자 유득공이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그러한 표현이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대해서 “통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려·조선 시대에도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의 시원은 조선사편수회라는 주장이 있다. 진흥왕 순수비 등에서는 단순히 “통”(通)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2) 발해 영토로 흡수된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는 중국사가 아니라 한국사의 일부로 여겨진다. 두막루는 5세기 중엽 부여가 고구려에게 멸망당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그 유민들이 나하(那河)를 건너 송화강의 북쪽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중국의 《위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라고 말했고, 지배 집단은 예맥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풍습은 부여와 매우 유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발해를 멸망시키고 926년 거란족이 세운 괴뢰 정부의 이름은 '동단국'이 아니라 동란국이다. '東丹國'에서 '丹'은 '단'이라고 읽지 않고 '란'이라고 읽는다. 동란국은 동쪽에 있는 거란국이라는 뜻이다. '契丹國'을 '거단국'이라고 하지 않고 '거란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4) 발해는 만주 지역을 다스린 한국의 마지막 국가가 아니다. 발해 멸명 후 후발해, 정안국, 올야국, 흥요국, 대발해(대원국) 등 발해 유민들이 세운 많은 나라가 있었다. 특히 정안국(定安國)은 1018년 즈음 거란에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까지 열만화, 오현명 등 90여년간 지속되었다.
고려
1) 고려장(高麗葬)은 존재하지 않는 풍습이다. '고려장'이라는 말이나 비슷한 풍습이 있다는 말도 이전의 역사서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국권 침탈기의 친일적인 인물의 기록과 일제 강점기의 몇몇 기록에만 나타난다. ‘고려장’의 이야기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오래된 옛 무덤을 도굴하기 위하여 날조한 유언비어이다. 이른바 부모를 내다버린다는 ‘고려장 이야기’는 일제 때 인물 심의린이 저술한 〈조선동화대집>에 수록된 ‘노부를 내다버린 자’라는 내용이 역사 기록상 처음 확인된 내용이었고, 책이 저술된 때가 일제에 의한 극심한 도굴 시점과 일치하던 때라는 것이다. ‘인생 칠십 고려장’이라는 말도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곡강시〉 중 ‘인생 칠십 고래희’가 음이 비슷하여 와전된 것이다. 더구나 노모를 지게에 진채 산에 올라 깊은 산중에 노모를 버린 아버지의 아들이 아버지가 늙으면 아버지를 져다 버릴 것이다 하여 스스로 지게를 가지고 하산하려는 모습을 보고 노모를 버린 아버지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본래 중국의 〈효자전〉이 이야기의 출처고, 또한 사신이 문제를 내고 버려진 노모가 풀었다는 〈어머니의 지혜〉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인도의 〈잡보장경〉 ‘기로국연조’가 원전이다.
2) 서희가 말로써 요나라 대군을 물리쳤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말로만” 요나라 대군을 물리쳤다는 말은 틀리다. 요나라 장수 소손녕이 승전을 거듭하였고, 결국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에게 패배하게 되자, 비로소 고려와의 담판에 응하게 되었다. 그때 서희가 나서서 담판을 짓고, 압록강 동쪽 280리 땅(흔히 강동 8주, 현대의 요동반도)을 얻었다. 다시 말해 대도수의 활약과 서희의 담판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결과이지, 서희의 담판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다.
3) 귀주대첩에서 강감찬(당시 71세)은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려 요군(거란군)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과는 멀리 떨어진 평야의 전투이다. 《고려사》 내용에 따르면, 강물을 이용한 전투는 제3차 고려-요 전쟁의 첫 번째 전투인 흥화진 전투이다. 또한 귀주대첩에서 고려군 10만에 요군(거란군) 20만 8천여 명이라는 말도 사실과 다르며, 이는 제3차 고려-요 전쟁 때의 병력 규모이지 귀주대첩 때의 병력 규모는 아니다. 귀주대첩 때의 승리 요인은 《고려사》에서 “겨울인데 갑자기 남쪽으로부터 비바람이 몰아치자 그것을 이용해 남쪽으로부터 공격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4) 고려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강남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서 몰래 들여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몰래 숨겨서 들여오지는 않았다. 문익점의 공로는 목화씨 유입과 목화 재배로 한반도 섬유 산업을 발전시킨 일이며, 그것을 후대 사람들이 치하하면서 “문익점의 목화 밀수설”과 같은 전설이 만들어졌다.
5)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고려사》〈최영열전〉에 따르면, 최영이 16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죽을 무렵에 남긴 말, 곧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