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송병준 (宋秉畯,노다 헤이치로 1857년~1925)
친일파라 하더라도, 그의 인생전체를 보다보면,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친일파가 되었거나, 혹은 간혹 참작할 만한 일화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삶은 친일파이지만, 삶 가운데 간혹 훈훈한 일화가 드물지만 있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 한 인간은 삶에서, 사회, 국가 모든 부분에서 도무지 미담이라고는 찾을수 없는 삶 자체가 오물투성이인 인간이 있다.
한국 창씨개명의 1호이자, 고종의 앞에서 칼을 휘두르고, 궁녀들을 희롱했던 한 남자 그리고 그 후손들 마저 개념없는 행동으로 욕을 먹는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함경남도 장진군 출생.
학자 우암 송시열의 9대 손으로 모친은 기생출신이다.
조선 말기 무관 정치인,정미칠적 중 한명
친일 이력으로 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 하사,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공로자 명감 353인]에 수록되었다.
또한 그는 자발적 창씨개명자 제1호 - 별명 노다 대감
일본 총리와 이토 히로부미를 직접 찾아가 나라를 파는 댓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할 정도로 후안무치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적극 친일파로 변절하여 한,일 병합 등 친일단체 일진회를 통해 일제를 적극 도왔다.
민영환 가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무과에 합격,오위도총부 도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는데 강화도조약 때 일본 무역회사 사주 오오쿠라와 합작하여 부산에 상점을 차렸다.이때 분노한 부산 사람들이 송병준을 찾아가 상점을 때려 부쉈다.
1884년 갑신정변때 사람들이 송병준의 집을 불태우자, 그는 본래 수구파(守舊派)에 속했으므로 1884년 조선정부로 부터 밀명을 받아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도리어 김옥균의 인품에 감화, 설득되어 암살 파견 사실을 이실직고하고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그 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으나, 86년에는 그와 함께한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해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흥해군수·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897년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황제와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임을 포기하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은신하며,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잠업(蠶業)과 밭 농사, 막노동에 종사하면서 숨어 지냈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르게 거친 공사장 인부일을 하였다.
이후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조선을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大谷喜久藏)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고종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7년 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 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일제의 지시에 따라 일진회를 조직하고 고종 양위에 앞장 서서 대신들을 협박하고 양위 운동을 펼쳤으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위해 군수물자 수송을 살피고 러시아를 정탐,국채 보상운동도 막는 등 철저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움직였다.
이완용 내각에서 내부대신을 하면서 일진회를 조종해 국민들이 한,일 병합을 간절히 원한다고 여론을 조성,조작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매국 외교에 대한 댓가로 일제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 등 나라를 팔아넘긴 댓가로 거액의 돈을 받아 챙겼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이후 송병준은 한일 합방에 대한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게 되어 한일 병합 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게 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 백작(伯爵) 지위에 승급한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의 원흉으로 몰려 여러 번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재산가가 되었으며, 부의 축적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강탈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진회와 시천교 재산을 사유화하여 부를 쌓았던 송병준의 재산은 1920년대 들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진회의 멤버였던 그는 천도교에서 파문 당하고 독자적으로 수만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시천교를 만들기도 했다. 1925년 2월 1일 경성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독살설
그는 1925년 2월 1일 친일 실업거두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런데 일설에는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에 대한 일화)
1.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을 벌리자 그곳에 찾아가 조선에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모으느냐?빨리 그만 두라고 온갖 행패도 부렸다.
2.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재산가가 되었으며, 부의 축적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강탈형’으로 평가된다.
3. 한국 최초의 친일 합작업자 제1호,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 제1호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4.또한 돈을 밝혔으나 의리와 은혜를 몰랐다. 민영환이 순절하자 그 재산을 빼앗으려고 민영환의 부인을 협박하다가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것을 낭설이라고 보도하면 사례하겠다고 《국민신보》에 제의했다가 《국민신보》마저 배신하였고, 《국민신보》의 이강호(李康鎬)가 이를 폭로한다. 또한 실업자이자 친구인 김시현(金時鉉)이 죽자 재산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재산 횡령 혐의로 사후에 소송까지 당했다.
5. 순종과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술 처먹고 궁녀를 희롱하다가 한 시종무관과 싸움이 난 적이 있다. 막판에는 칼까지 빼들었다가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끝나고, 송병준과 그 시종 무관 둘 다 자리 그들의 보직에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이 때 송병준과 칼부림 직전까지 간 그 무관이 정령벼슬을 하던 어담이라는 자인데, 나중에 그 자도 친일파가 되어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로 창씨개명을 하고, 중추원 참의까지 했다. 즉, 그냥 서로 싸우다 서로 죽였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6.가장 친한친구의 아내를 겁탈해서 데리고 살았다는 풍문이 돈다(이완용이 자신의 큰아들의 아내를 겁탈하여, 큰 아들이 자결했다는 풍문과 같은 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