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충혜왕은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반적인 왕들은 국가경제를 키운 다음에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는 방법으로 국가재정을 강화했다. 하지만 충혜왕은 왕이 직접 영리활동을 하는 방법으로 재정을 강화했다. 자신이 직접 무역 상단을 조직해서 돈을 벌었던 것이다.
b)또 충혜왕은 관료들에게 분배한 토지의 상당 부분을 회수하고 이것을 봉급제로 대체하는 방법으로 토지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다. 또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려는 특단의 노력도 없이 증세 정책을 강행하는 방법으로 재정수입을 늘렸다.
c) 충혜왕의 재정정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진보적인 것이었다. 서민층뿐만 아니라 부유층에게도 증세를 강요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은 기득권세력을 견제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증세를 강행하고, 그렇게 해서 증가된 수입의 상당부분을 사치와 방탕에 허비했다.
d)충혜왕의 재정정책은 서민층의 반발도 초래했지만, 무엇보다 기씨 집안을 포함한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을 불러왔다. 결국 기씨 가문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층은 몽골을 상대로 충혜왕 탄핵운동을 벌였다.
2.의료정책
습사성을 없애고, 동서대비원에 소속시켜서 도성 안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의복, 양식을 무상으로 주었다
3.고려인의 송환요구
만주의 요양, 심양 그리고 쌍성, 여진에 부랑하고 있던,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다(1331년)
4.원나라가 고려를 일개 원의 행성으로 만드는 ‘입성책동’ 막았다.
입성책동은 1330년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將伯祥)에 의해 추진되었다. 장백상은 중국의 강남(江南)사람으로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郎中)을 지낸 바 있었다. 이 해에 충숙왕이 퇴위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그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충혜왕이 직접 원나라의 우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에게 요청함으로써 곧 입성논의가 중지되었다.
충혜왕의 여러기행으로 고려 내에 충혜왕의 입지는 좁아졌고, 거기다 기득권의 이익을 저해하는 재정정책으로, 충혜왕에 대한 권문세족의 지지철회를 이유로 하여, 기씨집안이 충혜왕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 집안의 정치적 수장인 기황후가 충혜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음을 의미한다.
기황후 입장에서는 자신의 도움으로 복위한 충혜왕이 자기 집안을 재정적으로 압박하는 데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