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민주국 국기와 국장
1) 당시, 타이완은 청나라에게 병합된 다음 복건성 순무의 관할하에 있었다. 1884년에 청불 전쟁이 일어나면서 프랑스군은 타이완 북부의 석탄 광산에 주목하고, 타이완을 근거로 중국의 화남지방을 통제하려 하였다.
2) 청조는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순무급의 유명전을 파견하였다. 1885년에 성(省)을 설치하였으며 유명전을 순무로 임명하여 행정구역을 조정하고 대륙의 양무 운동과 같이 타이완의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3)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게 된다.
1895년 5월 8일 이토 히로부미와 오정방이 연대(煙臺)에서 비준서를 교환하게 되어 타이완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4) 이 소식이 타이완에 전해지자 주민들은 '청조의 매국행위'에 항의하고, 일본과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여 타이완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조는 기한 안에 타이완을 일본에 넘겨주기 위하여 타이완 순무 당경숭에게 철수해 본토로 건너오도록 명령하였다.
5) 이에 신사인 구봉갑(丘逢甲)이 천여 명을 이끌고 순무 청사에 가 당경숭에게 항일을 지휘해주도록 요청하였다. 당경숭도 이에 응하기로 하여 구봉갑 등은 1895년 5월 25일에 타이완 민주국 을 선포하고 당경숭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타이완 민주국이 선포된 이후 당경숭은 각부와 지방의 관리를 대부분 전직 관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사도 타이완에 주둔하였던 청군의 잔여 병사들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유영복을 민주대장군, 구봉갑을 의용군통령으로 임명하였으며 각 지방에도 방어 태세를 갖추어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였다.
6)한편, 일본은 비준서 교환 후 무력으로 타이완 민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5월 10일에 육군대장 가바야마 스게노리를 타이완 초대총독 겸 타이완 정벌 전권대표로 임명하여 타이완을 접수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타이완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7) 결국, 타이완 민주국은 일본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타이완 섬은 1945년까지 대만일치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타이완 민주국의 대총통>
1대 당경숭(唐景崧) - 1895년 5월 25일 ~ 1895년 6월 5일
2대 유영복(劉永福) - 1895년 6월 5일 ~ 1895년 10월 21일
유영복 타이완 민주국 대총통
* 실질적인 타이완 민주국의 리더 유영복: 유영복은 민주국 정부로부터 대장군에 임명되어 타이베이(臺北) 함락 후의 저항을 맡게 되었다.
타이완민주국 총통인 당경숭과 국방군사통령 구봉갑이 푸젠성 샤먼(廈門)으로 도망치자, 유영복은 타이난(臺南)에서 민주국의 재흥을 노렸다.
그 후 민중으로부터 총통으로 취임을 부탁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총통 권한대행 직위인 방변(幇弁)이라는 지위로 대만민주국 정부를 지휘하게 된다.
대만민주국의 실질적인 리더가 된 그는, a)타이난에 의회를 설치함과 동시에
b)지폐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타이난이 군사적인 우위에 있던 일본군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또 청나라에게서 지원을 얻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군이 타이난에 육박해오자 타이완 안핑(安平)에서 독일 선박을 타고 중국 본토로 도피했다.
한편, 일본은 비준서 교환 후 무력으로 타이완 민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5월 10일에 육군대장 가바야마 스게노리를 타이완 초대총독 겸 타이완 정벌 전권대표로 임명하여 타이완을 접수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타이완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타이완 민주국은 일본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타이완 섬은 1945년까지 일본의 통치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평가) 청일전쟁 이후 한때나마 대만의 항일 주체로 존속했던 대만민주국에 관한 대만 내부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대만 민족주의 독립진영 내에서 일부는 대만민주국을 신해혁명을 통한 중화민국 선포보다 16년 앞선,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주의 국가'로 평가하며 역사상 대만의 독자성이 시작된 기원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대만민주국의 주도 세력이 본토 출신인 청나라 관료들이었으며, 막상 일본의 대만 점령이 본격화되자 대다수가 본토로 피신하여 대만을 위한 저항 주체로 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불과 5개월의 단명 정부로 끝나 의미있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