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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30 12:57
[홍콩] 식민지 홍콩의 역사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048  

홍콩은 홍콩섬과 주룽반도(九龍半島) 일부, 신계(), 란타우 섬(爛頭島)과 부근의 234개의 대소 섬을 포함하며 서울의 약 두배 정도 크기인 1,104㎢의 면적에 인구 72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남방 최대 도시인 광저우와는 서북쪽으로 140km 거리에 있으며, 주장 강을 사이에 두고 마카오와 61km 떨어져 있다. 홍콩(香港)이란 이름은 과거 향나무(香木)이 많이 생산된 것에서 유례되었다. 명나라 시절 광저우와 선전 사이에서 향나무를 운송하는 항구라 하여 홍콩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금융 인프라를 갖추어 글로벌 중계 무역의 거점이자 상업과 무역, 제조업이 발달한 거대 도시이다. 또한 관광 쇼핑이 발달하여 작년 한해 동안 홍콩을 방문한 중국인만도 4천만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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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편전쟁 이전만 해도 홍콩은 광둥성 신안현(新安县, 지금의 선전시(深圳市))에 속한 매우 가난하고 낙후된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약 3천여명 정도였던 홍콩섬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돌을 캐는 광부였다. 명-청기에 왜구의 공격에 시달렸던 홍콩섬은 17세기가 되자 서구의 무역선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1760년 청 조정은 홍콩과 마주보고 있던 광저우를 국제무역도시로 개방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에서 유일하게 외부에 개방된 도시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칼 등 많은 상인들이 광저우에 상관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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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개방지로 광저우를 선택한 이유는 광저우 입구에 있는 황푸와 후먼(虎門)에 군대와 포대가 설치되어 있어 외국 선박들의 동태를 살피면서 유사시 언제라도 이들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청조의 대외무역정책이란 무역을 장려하여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보다는 철저한 경계심과 불신감 아래 외국인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체제를 침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통제하는 선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영국의 교역이 점차 늘어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청조의 무역방식에 불만을 품었고 새로운 통상 거점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중에는 동중국해의 저우산 열도와 하이난다오, 톈진 등이 있었다. 1793년 10월 2일 베이징에 도착한 매카트니(1st Earl Macartney) 경은 건륭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특명전권 대사로서 청조와 교섭하여 무역 제재를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광저우 주변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으면서 군사적 가치가 낮은 섬을 영국에 할양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건륭제는 오히려 터무니없는 요구라며 분개하여 외국 상선의 밀무역을 엄중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영국은 대중 무역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수출품은 대부분 중국 남방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무엇이 인기가 있고 무엇을 소비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심지어 중국인들은 쓸 일이 없는 나이프와 포크를 팔려고도 했다. 반면, 중국의 비단이나 차, 도자기는 영국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적어도 상술에서는 영국 상인들은 중국 상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영국 상인들은 방법을 바꾸어 아편을 판매했다. 광저우를 통해 통해 수입되는 아편은 19세기 초만 해도 4천 상자에 불과했으나 급격히 늘어나면서 아편전쟁 직전인 1830년대 후반에는 연간 3만 5천 상자에 달했다.

아편 중독은 광저우만이 아니라 빠르게 중국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고위 관료들과 황실까지도 아편에 중독되었다. 아편밀수의 주요 거점은 홍콩이었다. 아편을 실은 수백여척의 배가 오늘날 "빅토리아 항(Victoria Harbour)"이라고 불리는 항구를 들락거렸다. 홍콩 섬과 주룽 반도 사이에 위치한 빅토리아 항은 수심이 깊고 대형선박의 운항이 용이하여 "세계삼대천연항"이라고 불릴 만큼 천연의 자연항이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837년 도광제는 아편 금지령을 선포하고 홍콩 수역을 철저히 단속하라고 지시하였다. 광둥성과 광시성을 총괄하는 양광총독 등정정(鄧廷楨)은 영국 상무감독 찰스 엘리어트(Charles William Eliot)에게 모든 아편 상선을 중국 해역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엘리어트는 묵살했다. 양측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도광제는 호광총독(湖廣總督,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총괄하는 관료) 임칙서를 광저우로 파견했다. 1839년 3월 10일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모든 아편을 몰수했다. 총 2먼 4천여 상자, 2만근(약 12톤)에 달하는 양이었다. 임칙서는 몰수한 아편을 바닷물로 희석시켜 못쓰게 만들었다. 또한 광저우 주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군함을 배치했다.

임칙서는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지시킨 것이 아니라 오직 아편 교역만을 금지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국 상인들로서는 전체 수출의 2/3을 차지하고 있던 아편 교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교섭이 실패하자 ​엘리어트는 무력 응징에 나섰다. 영국 군함들과 무장 상선들이 주룽반도와 광저우 주변의 청군 거점을 포격했지만 많은 손실만 입은 채 모두 격퇴당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임을 깨달은 엘리어트는 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

당시 영국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파머스턴(Henry John Temple Palmerston) 내각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병력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제1차 아편전쟁"이었다. 인도 출신의 세포이 병사들이 대부분인 4천명의 군대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은 16척의 군함과 27척의 수송선에 나눠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1840년 6월 광저우를 봉쇄한 후 북상하여 샤먼을 포격했다. 8월 11일에는 저우산 열도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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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몰수로 시작된 사건이 극단적으로 치닫으면서 영국이 선전포고와 함께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청 조정은 당황했다.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후 송환하고 직예총독(베이징과 허베이성, 허난성을 총괄하는 관료) 기선(漆善)을 급히 광저우로 보냈다. 기선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우며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청조 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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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 해역에서 벌어진 영국-청군간의 해전.  우수한 대포를 갖춘 영국 군함들은 ​일방적으로 청군의 구식 정크선들을 격파하여 청측은 29척 중 26척이 격침당했다. 반면, 영국해군의 피해는 돛배 하나가 포탄을 맞고 부러졌을 뿐이었다.

엘리어트는 기선을 협박하면서 아편 몰수에 대한 배상금 600만냥과 ​광저우 이외의 항구를 개항할 것, 중국 연해의 섬 중에서 하나 이상을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영토 할양을 거부한다면 광저우에 청조의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자유교역과 관세협정,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였다. 막상 가장 중요한 문제인 아편 교역에 대한 것은 없었다.

또한 이 때만에 해도 영국은 홍콩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한 홍콩섬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과 ​거리가 너무 먼데다 정치적 군사적 가치도 낮고, 경제적으로도 중국 동부 시장을 개척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양측의 교섭이 진행되고 영국의 요구 조건이 강화되면서 엘리어트는 "영국인들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공간"으로서 홍콩의 할양을 요구했다. 엘리어트는 만약 청조가 홍콩을 할양한다면 저우산 열도를 비롯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철수할 것이며 다시는 개항장을 확대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841년 1월 25일 홍콩섬에 병력을 보내어 점령한 후 일방적으로 "중국은 이미 홍콩섬을 영국에게 할양했으니 이 섬에 거주하는 영국인들과 외국인들은 영국 법률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영국군이 홍콩섬을 점령하자말자 영국인 아편 상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편 창고를 짓고 영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홍콩섬을 영구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다. 파머스턴과 인도 총독 오클랜드는 오히려 저우산 열도가 청을 압박하기에 훨씬 가치가 있으며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고 여겼다. 또한 남방 무역의 거점은 광저우여야 했다. 홍콩은 가치가 낮았다. 아편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영국 상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한편으로, 파머스턴은 그렇다고 홍콩을 아예 포기할 생각 또한 없었다. 한마디로 다 가지겠다는 심보였다.

1841년 1월 20일, 기선과 엘리어트 사이에 이른바 "천비조약(川鼻条約)"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기선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황제에게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재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뒤늦게 보고를 받은 도광제는 격분했다. "한뼘의 땅과 한명의 주민도 모두 짐의 것이다. 기선이 멋대로 홍콩을 내주고 겁도 없이 짐에게 은혜를 구하느냐" 기선은 파면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하지만 기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해결될 리가 없었다. 양측의 교섭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아편전쟁은 재개되었다. 1841년 8월 26일 영국 원정군은 샤면을 점령하고 10월 1일 저우산 열도를 다시 점령했다. 10월 13일에는 닝보(寧波)를 점령하여 양쯔강 하구를 봉쇄하였다.  

1841년 9월 조지 애버딘(George Aberdeen)이 신임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중외교의 목적은 무역이지, 전쟁이 아니라며 홍콩섬을 반영구적인 거점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엘리어트를 대신해 중국전권대사​였던 헨리 포팅커(Henry Pottinger)는 애버딘에게 "홍콩은 대중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계속했다. 6월 19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고 8월 10일에는 난징까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백기를 들었다. 1842년 8월 29일 난징에서 흠차대신(欽差大臣, 지방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황제에게 임시로 전권을 부여받은 후 현지로 파견되는 고위 관료) 기영(耆英)과 포팅커 사이에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국은 광저우와 푸저우, 샤먼, 닝보, 상하이를 개항하고 1200만 달러의 전비 배상금 외에도 별도로 아편 몰수 대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또한 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 관세권도 빼앗겼고 홍콩은 영국에게 영구적으로 할양되었다. 도광제는 홍콩같은 조그만 섬의 할양 따위는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으나. 중국 영토가 외세의 압박에 굴복해 식민지로 빼앗긴 첫번째 사례였다.

영국은 홍콩 섬을 할양받아 중국 침략의 발판을 차지했다. 하지만 홍콩은 면적이 작고 거주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기에 맞은 편에 있는 주룽반도를 넘보았다. 또한 주륭반도는 영국의 횡포에 반발한 중국인들의 주요 항영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주룽반도를 점령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1856년 10월 이른바 "애로우 호 사건"으로 영, 프 연합군이 출동하여 제2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10월 23일 영국 해군은 광저우를 공격해 청군 포대를 점령하고 학살과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광저우의 관리들과 주민들은 격분하여 홍콩섬에 대한 봉쇄를 선언하였다. 홍콩섬과의 어떤 무역이나 화물의 선적, 배의 운항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영국군의 무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광저우 주둔 영구군 사령관 스트로벤지 소장(C. Straubenzee)은 극동에서 영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좁은 홍콩섬만으로는 안되며, 또한 영국이 주룽반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미국이나 프랑스 등 다른 나라가 점령하여 홍콩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며 주룽반도 남단의 침사추이(尖沙咀)의 점령을 건의하였다. 1860년 3월 18일 영국군은 침사추이에 상륙해 점령한 후, 양광 총독 노숭광(勞崇光)을 협박하여 연간 500냥의 임대료를 주는 대가로 주룽반도 남단에 대한 영구 조차권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면서 주룽반도을 홍콩 식민지 정부의 관할에 귀속시킨다는 조항을 넣었다. 1861년 1월 19일 영국 전권특사 엘진(Earlof Elgin) 백작은 "주룽반도는 대영제국에서 파견한 관원이 관할한다"며 홍콩과 주룽반도가 영국의 영토가 되었음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홍콩의 할양은 기울어져 가는 중국​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의 선례가 되어 영국만이 아니라 다른 열강들 또한 중국 나눠먹기 경쟁을 시작하였다.

홍콩과 주룽반도를 장악한 영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홍콩 식민지를 더욱 확대할 욕심을 가졌다.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 가운데, 러시아가 뤼순을 조차하고 독일이 산둥성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하자 영국 역시 주룽반도 북부 신계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양광 총독 담종린(譚鍾麟)은 홍콩 주변의 일부 토지를 조차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영국은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영국은 주룽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계의 조차를 요구했다. 면적은 953km²에 달하여 홍콩의 10배가 넘었다. 리훙장이 경악하자 영국 공사 맥도널드는 독일과 러시아가 차지한 지역이 훨씬 넓지 않냐면서 협박하였다.

결국 1898년 6월 9일 베이징에서 전탁홍콩계지전조(展拓香港界址專條)가 체결되었다. 신계에 대해 99년간 조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서 홍콩 식민지의 면적은 11배로 늘어났고 관할 수역은 50배나 확장되었다. 영국이 강제로 신계를 빼앗자 현지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무기를 사모으고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항영 봉기를 하였다. 수천여명이 12개의 포를 동원해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격퇴당했다. 또한 무력한 청 정부는 영국을 자극할까봐 이들을 지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영국군은 이를 빌미로 군함 6척과 2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주륭성을 점령한 다음 선전(深圳)까지 점령하여 홍콩 식민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홍콩 총독 블레이크는 선전까지 점령하는 것은 역량 밖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측과의 협상 끝에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렇듯, 1841년에는 홍콩이, 1860년에는 주룽반도 남단, 그리고 1898년에는 신계가 99년을 기한으로 조차되어 영국령 홍콩 식민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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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홍콩 거리. 영국의 지배 아래 홍콩은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1970년대까지도 부패와 범죄의 온상이었다. 또한 홍콩에 거주하는 사람의 95%이상이 중국인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지배자로서 중국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하였고 중국인들은 참정권도 없을 뿐더러 호텔이나 식당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홍콩에 대한 영국의 지배 방식은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던 캐나다나 호주와 달리 철저하게 백인 우월주의 아래 영국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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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ston 18-03-30 13:32
   
잘봤습니다.
중국지명은 정말 짜증나네요.
걍 예전처럼 우리한자 발음 대로 하면 더 이해가 잘 될텐데 ..  ㅠㅠ
history2 18-03-30 13:57
   
아 ㆍ오늘이 마감이라 은행 대출창구 에서 노트북으로 작성했는데 ㆍ이미지가 안떠지네요 ㆍ수정 해야 겠습니다(월급은 주어야지요 ㅠㅠ)
촐라롱콘 18-03-30 14:43
   
99년 기한의 조차지였던 '신계'지역과는 달리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영국의 항구적인 식민지였던지라.....

원칙적으로 홍콩섬-구룡반도는 영국이 중국에 반환을 하지않을 수도 있었지만,

신계지역이 홍콩전체면적의 70~80%를 차지하고 있고 홍콩섬-구룡반도의 필수불가결한 배후지 역할을

담당하는지라, 영국 입장에서 홍콩섬과 구룡반도만으로는 홍콩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홍콩 전체를 반환하게 된 것입니다.
     
쇠고기 18-03-30 15:44
   
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배우고 갑니다!
촐라롱콘 18-03-30 16:21
   
[[아편전쟁 이전만 해도 홍콩은 광둥성 신안현(新安县, 지금의 선전시(深圳市))에 속한 매우 가난하고 낙후된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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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보면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지역은 깡촌이자 해적소굴에 불과한 초라한 역사지만...

그래도 남송의 마지막 황제인 소제가 마지막 근거지로 삼고 최후를 마친 지역이기도 합니다.

소제가 즉위한 지역이 오늘날 홍콩국제공항인 첵랍콕공항이 위치한 란타우섬으로 추정되고 있고

소제와 육수부 등의 신하들이 최후를 맞이한 애산 또한 홍콩 인근의 섬들 가운에 하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홍콩 구룡반도에서의 '구룡'이 남송황제와 연관된 지명유래라는 전설도 있습니다.
history2 18-04-02 01:07
   
남송과 홍콩의 역사...아이러니 하네요
history2 18-04-02 01:13
   
홍콩은 한자로는 향항,,,,중국어로는 샹강이라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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