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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6 23:57
[한국사] 낙랑 유물 조작문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을까?
 글쓴이 : 콜라캔
조회 : 1,201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 유물. 우리 같은 대중들에게는 항상 조작 시비에 걸려 의문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낙랑 발굴 주체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인데다 낙랑 자체가 한국사람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식민지 문제와 굉장히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알려진 조작 문제가 일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몇몇 유물들(특히 봉니)에 대해 조작문제가 제기되기도 했고, 그 중에는 실제 조작된 유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의문이 마구마구 증폭되었지만, 우리 같은 일반 대중들은 이 의문이 잘 해소되지 않았으니 계속 조작 시비가 나올 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글을 쓰는 저도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그런 조작 문제에 대해 잘은 모릅니다. 저 역시 그런 조작 시비가 있다는 것은 여기 계시는 분들이 다 잘 알고, 자주 인용하시는 SBS 스페셜을 보고 알았고, 여기 나온 내용 이상은 알지는 못합니다.


  
그걸 모른다는 놈이 어떻게 쓰냐? 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거 외에도 낙랑 유물은 많으니깐요.
여기서는 그런 유물들보다는 실제 눈으로 관찰된 유물들을 토대로 말을 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기로 우리가 낙랑 유적을 발굴할 수도 유물을 볼 수도 없는데, 그게 조작인 지 아닌 지 어떻게 아냐? 며 굉장히 회의적인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았는데, 안타깝지만 낙랑 유물은 실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가 굉장히 잘 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꽤 많은 낙랑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2001낙랑특별전을 개최를 준비하면서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낙랑 유물들을 검토하여 상당 부분 검증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낙랑 유물 컬러 사진들이 이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또 이 때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은 되었으나, 수장고에 유물만 보관되어 있고, 보고서로 발간되지 않은 봉산 양동리 전실묘평양 정백리 8,13호분에 대해 보고서로 발간한 바 있습니다.(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세요.)


  
최근에도 오영찬 교수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봉니 99197점을 전수조사하고 검토하여 진위여부를 검토한 바 있습니다(오영찬 2015). 이 결과 일부 조작이 의심되는 유물들이 있긴 하나, 대부분 진품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 내에 소장되어 있는 낙랑 유물들은 대부분 검토되었고, 더욱이 이 유물들이 일제강점기 때 발굴된 유물들임을 고려하면 위의 유물들을 모두 조작임을 인정하여도 모든 유물들이 조작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있는 것만을 언급하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반출된 낙랑 유물들은 일언반구도 없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 같습니다. 다행이게도 일본에 남아있는 낙랑 유물들도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습니다.


낙랑 발굴사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 지금의 동경대학교의 전신인 동경제국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평양에 있는 낙랑 발굴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동경대학교 유물 수장고에는 당시 보고서를 낸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반출한 상당한 양의 낙랑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이미 1980년대에 조금 알려졌는데, 일본학자인 타니 도요노부(谷豊信) 교수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동경대학교 수장고에 보관된 낙랑토기를 중심으로 관찰·분석 후 이를 토대로 4편의 논문을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연구가 거의 되지 않았던 낙랑 고고학 연구에 단비와 같은 발표였지만, 토기를 중심으로만 보고가 되었고, 이후에는 추가 분석이 없었기에 더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9년 다시 세상에 알려졌는데, 현재 영남대학교에 재직 중이신 정인성 교수님에 의해서입니다.


  
정인성 교수님은 1997년 경북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일본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는 1999년부터 동경대학교 수장고에 있는 유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은 하였지만, 정리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뒤죽박죽 쌓이고 쳐박힌 낙랑유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1여년간 이 유물들을 세척하고 꼼꼼히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유물들을 그냥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발굴하고 남긴 야장(야장이란 발굴현장에서 그날그날 한 작업들을 발굴한 당사자가 수기로 남긴 노트를 말한다. 이는 이후 발굴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참고가 된다.)들과 유물을 넣어둔 봉투의 기록들을 함께 꼼꼼히 비교·분석을 실시합니다.


  
이를 토대로 2000년부터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발표하였고, 2002년에는 이를 토대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됩니다. 그는 낙랑토성 내에 청동기와 유리를 생산하는 공방이 있음을 밝혀냈고, 낙랑 봉니가 출토한 정확한 위치들을 복원해냈으며, 이 외에도 낙랑에서 제작된 여러 유물들의 제작기법 등을 밝혀내 당시 기초적인 연구조차 실시되지 못했던 낙랑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2008년에는 일본에 있는 낙랑 유물이라는 도서를 편찬해 일본에 있는 낙랑 유물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낙랑 유물은 이미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었고,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부 조작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토대로 모든 유물들이 조작되었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조작설은 일축시킬 수 있습니다.


  
쓰다보니 매우 긴 글이 되었는데요.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최근에는 낙랑토기가 중심이긴 하지만, 한반도 중부지역(경기, 서울, 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약 30여개의 유적지에서 상당한 양의 낙랑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역시 낙랑 유물 조작설을 일축시킬 수 있는 좋은 고고학적 증거가 아닐 까 합니다.


  
이상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두서 없이 써서 중간중간에 좀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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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3-27 00:19
   
대동강의 유물... 그리고 그 거주민이 이동하여 교치된 낙랑군의 유물을 비교해봐야 합니다.
상관관계가 명확하다면 기존의 통설이 유지될것이고, 상관관계가 없다면 낙랑이 2개가 존재하게 되는거죠.

문헌적으로는 삼국사기의 낙랑국과 낙랑군, 모용씨 시절에 교치된 낙랑군...
3개 장소에서 기원을 둔 낙랑유물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비교해서 문화적 연속성을 봐야죠.
상관관계가 있는가, 전혀 다른가 ?
     
도배시러 18-03-27 00:42
   
낙랑군 교치이후에... 대동강 낙랑과 동일한 유물이 발견되는 곳은 중국의 어디인가 ?
이게 키포인트 입니다. 낙랑이란 명칭과 낙랑 거주민이 집단 이동했으니...
중국으로 교치된 낙랑군의 연속성이 증명되어야 한반도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말이 나오겠죠.
     
콜라캔 18-03-27 00:44
   
일단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낙랑군이니 낙랑국이니 교치된 낙랑군이니 하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저 일제강점기 때의 낙랑 유물을 무조건적인 조작 문제로서 보는 것이 적절한가? 에 대한 문제의식만을 던지는 것이죠.
          
도배시러 18-03-27 00:49
   
조작과 진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 문제를 푸는 방법으로 연속성을 제시하는거죠.

대동강에서 나온 유물이 중국의 낙랑군에도 나오네 ?
중국 낙랑군 유물과 연속성을 가진 대동강 유물은 사료적 고고학적 지지를 받겠죠
               
콜라캔 18-03-27 01:21
   
기본적으로 글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그 교치된 낙랑군과 조작과는 하등 1도 관련이 없습니다.

이 글은 평양에 있는 실체가 낙랑군이든 낙랑국이든 어디 외계에서 떨어진 거든 간에 그 유물들 자체의 존재를 의심해선 안 된다라는 거구요.

그리고 계속 제기 하시는 교치 이후와 이전은 서로 하등 관련도 없는 교치 이후는 껍데기만 낙랑군인데 둘 간의 어떤 연속성이 왜 나타나야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313년 이후의 요동 요서의 정확한 고고학적 양상은 잘 모르지만 평양과 요동 요서 지역들이 전실묘인 벽돌무덤에서 석실묘인 돌방무덤으로 바뀌어가는 건 알겠네요.

그리고 두 지역 다 석실봉토분 내에 채색된 벽화들이 성행한다는 것도요
                    
도배시러 18-03-27 01:39
   
"껍데기만 낙랑군"이란 말의 의미는 교치가 없었다는거죠.

낙랑군 교치설은 대다수 주민(남녀노소)의 이동을 의미하니 문화적 이동이죠.
성인 남자들끼리만 이동시켰다면 껍데기로 봐도 될듯 합니다.

교치란... 대동강 낙랑 유물/유적을 만들었던 남성들만 이동한것이 아니라
그 유물을 소비하던 노인, 주부, 여성, 어린이... 그 가족들도 함께 이동한겁니다.
그러니 (교치)이동한 곳에서도 같은 유물과 유적을 생산하고,
소비할려는 문화가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정상입니다.
                         
콜라캔 18-03-27 08:10
   
자꾸 교치문제로 끌고 가시니 저도 이거에 대해서 답을 할 수 밖게 없는데요.

대체 어느 누가 교치설이 "대다수 주민의 이동"을 상정하는지요?
그리고 껍데기만 설치하는 게 왜 교치가 없었다고 되는 건지요?

중국에서 그런 식으로 껍데기만 군이나 현을 이동시키는 경우는 여러 사례가 있습니다.

님과 저도 아는 요서 금주시에서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으로 이동하는 것이 껍데기만 이동시킨 대표적인 사례구요.

그리고 공손씨정권 때 요동의 답씨현 풍현 문현 등이 산동반도에 새롭게 설치된 것이 제가 아는 사례이기도 하구요.

아래에 문화소비와 유적유물을 생산한다는 그런 거에 대해서도 제가 할 말이 있긴 하지만 길어지는 내용이기도 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촐라롱콘 18-03-27 09:42
   
요서의 모용외에게 귀부한 낙랑의 호수가 1,000여 가 규모인데....
1가의 규모를 최대 10인으로 잡더라도 인구수로 최대 1만명을 넘지는 못할 겁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지난 2~3천년 동안에만도 여러 수많은 민족과 왕조가
수도 없이 거쳐간 요서지역에서.... 1만명 이하 규모의 집단이 남긴 유물-유적 등의
의미있는 발굴이 이루어길 가능성은 적어도 빠른 시일내에는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도배시러 18-03-27 15:01
   
낙랑군 교치설의 부정이라...
주민이 이동한 사료적 근거가 없다는 것인지...
선사고고학적 방법론이 판치는 상황에서 신선하네요.
                         
콜라캔 18-03-27 15:05
   
? 대체 글을 어떻게 읽으면 저게 교치설을 부정한다는 말이 되는지요?

교치설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님이 전제하신 교치= 많은 인구가 이동한다는 그 전제를 누가 입론으로 세우냐는 겁니다.

또 교치라는 게 왜 항상 인구이동이 전제되어야하는지도 의문이구요
                         
도배시러 18-03-27 16:04
   
호오~ 인구이동없는 교치가 존재한다는건가 ?
그때는 이름만 따왔다고 기록을 하더만... 수나라 요서군처럼.

암튼 낙랑군이 교치가 되면 인구가 몇명이어야 한다는 것인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보삼 ?
                         
콜라캔 18-03-27 18:58
   
????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시고

일부 말만 잡아서 말꼬리나 잡으시고 참 안타깝네요...
꼬마러브 18-03-27 00:20
   
이 분 가생이까지 진출하셨네...

세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1. 그것이 토착세력과 중국과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적으로 볼 여지는 없는가?

2. 북한사학계의 주장대로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추정할 수는 없는가?

3. 그것들을 광무제의 진출 (AD 44년) 이후의 것으로 본다면?

- 위 모든 가능성이 배제되더라도, 그 유물들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편견 없이 유물 근거를 보고 가설을 세우는 것과
미리 답을 정해놓고 유물을 해석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은가?

이하 남는 한 가지의 문제점

1. 그것이 문헌적 근거와 교차검증이 되는가?
     
꼬마러브 18-03-27 00:35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전에 반드시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

- 권위 내려놓기

하버드대 교수든 서울대 교수든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한다면 사이비
     
콜라캔 18-03-27 01:04
   
저는 아마 2009년경 즈음에 가생이에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진출이라는 말을 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ㅎㅎ?

제가 서울대의 권위나 이런 것에 기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일종의 선을 그어버리시면 기본적으로 제가 인용할 때 만에 하나 서울대 분의 논문을 인용하게 되면 권위에 기댄다는 말씀을 하실 거 같네요..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신 거 같습니다.

여차하고 사실 이 문제로는 어떤 토론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애초 이 글이 그런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서 올린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번이나 2번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인데, 쉽게 얘기하면 평양지역의 그런 산물들을 토착세력의 결과로서는 볼 수 없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게 결국 이런 관점은 '낙랑 = 중국 식민지'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죠. 낙랑이 중국 식민지도 아니지만은, 어쨌든 '식민지 = 나쁜 것'이라는 기본 전제가 이미 깔려있기 때문에 낙랑군을 요동이나 요서로 밀어내는 것이 그 이유더라구요.

결국 이런 전제가 깔린 것이라면 건전한 토론을 할 수가 없어서 제가 이런 토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만 답변드린다면

1번과 2번은 최근 한국고고학회에서나 영남고고학회에서 펴낸 '한국고고학강의'나 '영남의 고고학'을 정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들에서 나온 '원삼국시대' 파트에서 나오는 한반도의 고고학적 유물 분포만 보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랑 = 식민지인가 라는 이런 성격 문제는 굉장히 긴 글이 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3번째 문제는 애초 평양에서 기년명이 나오는 유물들이 광무제 이전 것들이 충분히 확인되고 있고, 이 유물들과 광무제 이후 유물들이 고고학적으로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윤내현 등이 제기하는 그런 의문은 아직까지도 왜 언급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밑의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라는 문제와 마지막 1번의 문제라며 언급하신 교차검증 문제 역시나 너무 길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길게는 언급하지 않겠고

기본적으로 낙랑 관련 1차 사료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사기 하본기나 후한서 본기의 당나라대 주석이 아니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1차 사료라는 점만 언급할 수 있겠네요.

이러면 진서 태강지리지를 가져오면서 이게 280년대 당대 사료라고 하실 거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태강지리지는 당나라대 편찬된 사서입니다.
          
꼬마러브 18-03-27 07:41
   
1.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그저 진실이 궁금할 뿐 낙랑군을 식민지로 보던 아니던 관심이 없습니다. 논점 이탈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2. 1번과 2번은 최근 한국고고학회에서나 영남고고학회에서 펴낸 '한국고고학강의'나 '영남의 고고학'을 정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들에서 나온 '원삼국시대' 파트에서 나오는 한반도의 고고학적 유물 분포만 보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 고고학적 유물 분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자료 부탁드립니다.

3. 저는 <삼국지>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한사군을 탐구하는데 있어 1차 사료는 <삼국지>와 <후한서>등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교차검증의 부분입니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교차검증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이것이 옳은 행태로 보이지 않군요.
               
콜라캔 18-03-27 08:53
   
댓글 오류가 2번이나 나서 자꾸 날려먹네요... 알고보니 링크를 띄우면 오류가 나는군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번역되어 있는 링크를 띄울 수가 없네요 이해바랍니다.

1. 논점을 흐릴 생각은 없었는데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2. 제가 일일이 책을 찍어서 올려드릴 수 없으니 읽어보시라고 권한 겁니다. 위에서 진실이 알고 싶으시다 했는데 그럼 고고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낙랑 문제라면 기본적인 개설서정도는 읽어보셔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3. 서울대에 한이 맺히셨거나 원수관계라도 되시는 지 왜 자꾸 서울대 서울대 하시는 지...

이 문제는 서울대랑 하등 1도 관련이 없구요. 그 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읽었냐 안 읽었냐의 차이입니다.
                    
꼬마러브 18-03-27 14:43
   
그래서 낙랑 문제를 공부하려고 사서를 정독했죠. 적어도 댁보다 오환선비동이전도 더 많이 탐구했을 겁니다.
                         
콜라캔 18-03-27 14:54
   
그렇군요 그럼 낙랑군의 위치 문제와 관련한 논란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거 정도는 아실텐데요... 저랑 다른 삼국지 판본은 읽으시지는 않았을테니깐요
                         
꼬마러브 18-03-27 14:57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고구려나 이전의 위만조선, 그리고 후의 고려까지도 그 영역과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콜라캔 18-03-27 15:00
   
제가 말씀드리는 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낙랑 위치는 요서나 요동과는 연계 지을만한 구절이 보이지 않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좀와라 18-03-27 00:32
   
어떤 유물을 발굴 함에 있어서 그 유물이 누구의 유물인지를 알려면 기록이나 명문등이 적힌 유물의 발견이 선행되어야 하죠.

지금 평양지역에서 나오는 유물을 낙랑유물이라고 추정하는 것의 근거는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의 다음 내용 입니다.

"평안도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삼국(三國) 시대에는 고구려의 소유(所有)이었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摠章) 원년.】 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이를 멸(滅)하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효공왕(孝恭王) 9년 을축 【당나라 애제(哀帝) 천우(天祐) 2년.】 에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스스로 후고려왕(後高麗王)이라 일컫고 패서(浿西) 13진(鎭)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패서도(浿西道), 또는 북계(北界)라고 칭하였다. 숙종(肅宗) 7년 임오 【송나라 건중정국(建中靖國) 2년.】 에 서북면(西北面)이라 칭하고, 고려 말에 황주목(黃州牧)·안악군(安岳郡)·철화현(鐵和縣)·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가, 홍무(洪武) 무진년에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붙이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평안도(平安道)로 고치고, 16년 병 신 에 영길도(永吉道)·갑산군(甲山郡)·서면(西面)·여연(閭延) 등의 땅이 본도(本道)와의 거리가 너무 멀므로, 소훈두(小薰頭) 이서(以西)를 떼어 여연군(閭延郡)으로 삼고 내속(來屬)시켰다.

윗 기록을 근간으로 해서 평양에 낙랑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것 이거든요.

그런데 저 기록과 같은 목록에 그 지역 특산물을 설명하고 다음 란에 "옛 장성[古長城]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 이런 기록이 있단 말입니다.

그럼 지금의 평안도 지역에 만리장성(저 때의 만리장성은 지금의 명장성이 아니라 진 장성 이겠네요)이 있냐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라는 기초사료의 인용 자체가 왜곡이라고요. 이런 논리적인 문제 때문에 억지로 존재 하지도 않는 천리장성을 만들어서 저 곳에 있다고 하는 것 이고요.

낙랑군의 말도 안되는 위치 비정 때문에 고려의 강역이거나 신라의 강역 거기다가 발해의 강역 뿐만 근세조선의 강역 까지도 엉망이 되어서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무슨 기초사료를 제 마음대로 뺏다 끼었다 합니까?

지금의 평양지역에선 한성이라는 명문이 적힌 유물이 발견 되었으면 저 지역은 한성이지 왜 평양이란 말이에요. 더군다나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장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평양은 장성 안 쪽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장성 바깥 쪽이 아니라... 이러면 기존의 위치 비정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 이에요. 저는 그 것을 기록 특히 세종실록 지리지에 근거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 이고요.
     
콜라캔 18-03-27 01:06
   
낙랑군과 관련된 1차 사료는 조선시대 기록이 아니라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삼국지 위서 동이전'입니다.

제가 문헌사료를 꼼꼼하게 공부하지는 않아서 그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잘 모르겠구요. 그리고 저기 보면 세속에서 그렇게 전한다고 하는 거지 그렇게 자기들이 생각하는 지는 모른다는 거네요.
          
칼리S 18-03-27 07:27
   
저 분은 그냥 환뽕 맞은 분이라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는 분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저 부분은 대부분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셨던 분들이라면, 고려때 쌓은 장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로 생각하지, 저걸 중국의 만리장성과 연관짓지 않습니다.
칼리S 18-03-27 07:24
   
여기 몇몇 분들은 애당초 고고학적인 건 무시하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강단사학의 제대로 된 논문들은 애당초 머리 아파서 읽지도 않고, 인정을 안 합니다. 그냥 식민사학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인 분들이니깐요.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는 없어야 한다는게 이분들의 확고한 신념이죠. 낙랑유물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을 하셨던 학자분들은 결코 평양일대가 낙랑군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죠. 그리고 이건 매국친일사학이 아니라, 우리 고려, 조선 조정의 역사인식이기도 했고요.
     
콜라캔 18-03-27 09:00
   
굳이 학계의 어려운 논문을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애초 논문이라는 게 저희 같은 대중을 위해 쓰여진 게 아니니깐요.

제가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건 평양이 낙랑군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제가 발굴한 낙랑 유물을 일부 조작설을 근거로 모든 걸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주요 논지입니다.

다만 위의 댓글 양상들이 지속적으로 낙랑 위치 문제로 말씀들을 하시는데 글이 길어서 그런 지 읽지도 않고 댓글을 단다는 느낌밖게 안 들어서 아쉽네요.
신수무량 18-03-27 09:21
   
댓글 내용 중 '환뽕' 이라는 단어와 '원삼국시대'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쓰시는 분들은 반성(??)하세요.
'식뽕같은 역사매국노들' 이렇게 불리면 좋겠습니까?
 아무리 역사를 뭐같은 애들한테 배웠어도 정신이 맑으면 옳바른 생각을 하는데... (그 뿌리부터 잘못되었을까...)
     
콜라캔 18-03-27 09:25
   
?
     
촐라롱콘 18-03-27 09:48
   
[[정신이 맑으면 옳바른 생각을 하는데... (그 뿌리부터 잘못되었을까...)]]........???
.
.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신수무량님이 생각하시는 "맑은 정신과 올바른 생각"의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요...^^
          
신수무량 18-03-27 10:29
   
어렵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맑고 옳바름은 지금까지  아기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께 선생님께 그리고 스스로 배운 삶의 방식(도덕와 윤리를 포함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겁니다. 달려드는 것 보니 뭔가 마음에 박히는게 있나 보네요?? ( 대략 서너분 중이 두 분이 오셨군요......ㅎ)
               
콜라캔 18-03-27 11:57
   
저는 이런 천박한 글에는 답글을 달지 않습니다.
                    
신수무량 18-03-27 15:41
   
단어를 함부로 쓰시는군요..
가난한서민 18-03-27 10:48
   
일본은 중국 관동지방부터 시작해 만주랑 중국 동부를 지배했잖아요 그들은 북경의 낙랑의 유물을 가져다가
대동강(평양)에만 무수히 가져다 박아둔 겁니다. 그러니 진품도있고 모조품도 있죠 다른곳엔 나오지도 않아요
10톤이 넘어가는 석상도 훔쳐가는데, 무덤은 고구려 무덤이긴 하지만 무덤이나 유물이라고 못옮길까요
가난한서민 18-03-27 10:50
   
최근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세키노 타다시 일기를 공개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세키노가 1918년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나라 및 낙랑 유물들을 미친 듯이 사들여 조선총독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①“대정 7년(1918년) 3월 20일 맑음 북경…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漢代ノ發掘物多ク, 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余極力蒐集ス)

세키노는 한대(漢代)뿐만 아니라 낙랑(樂浪) 출토품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3월 20일은 300원(지금의 1500만원)어치를 샀다고 했는데, 22일에는 얼마치를 샀다고는 하지 않고 ‘한대 및 낙랑 출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고 썼다.

 세키노가 총독부 돈으로 북경의 골동품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이 사들여 총독부로 보낸 그 유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유물들이 ‘낙랑=평양설’을 조작하는데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강단사학자들은 ‘낙랑=평양설’은 100년 전 조선총독부 시절에 논증이 끝난 ‘정설, 통설’이라고 주장한다.
     
촐라롱콘 18-03-27 11:45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漢代ノ發掘物多ク, 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余極力蒐集ス)]]
.
.
.
이걸 낙랑=평양설을 조작하는데 사용했다는 근거로 해석하다니....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가난한서민님의 해석대로라면 낙랑출토품은 중국이 먼저 발굴하고 연구해서
이를 낙랑출토품이라고 규정지은 이후에..... 낙랑출토품들이 북경 유리창가 등의
골동품상가로 흘러들어갔고... 이를 세키노 타다시 같은 일본인들이 구입했다는 논리인데...

이를 워쩝니까....??? 낙랑유물들을 처음 발굴하고 연구해서 이를 "낙랑유물'이라고 규정지은
이들은 일본학자들이 시초인뎁쇼....!!!  당시 중국에서는 낙랑유물-출토품에 대한 개념 자체도
성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요....???

이미 평양일대의 낙랑유물들은 1910년대 초기에 이미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있는 상태에서....

세키노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의뢰받은 "중국에서 조선 및 내지 유물과 관계있는 물품을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북경 유리창가에서도 낙랑출토품들과 같은 류의 골동품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구입했다라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 아닌가요..??

물론 북경에서 사들인 낙랑출토품들과 같은 류의 골동품들은 당연히 평양의 낙랑유물들이
중국계통이다라는 학설을 더욱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사용되었겠지만.....
          
가난한서민 18-03-27 12:58
   
그러니까 저기서 사들여서 대동강에 가져다 놓고 유물을 발견했다고 1910년부터 시작한거죠
왜 한사4군 유물이 대동강에 90%이상이 박혀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촐라롱콘 18-03-27 14:22
   
이 분이 난독증이 있으신가.....???

일제시기 평양지역의 낙랑유물은 1910년대 초(1911~1913)에 이미 대거 발굴된 상태이고

세키노가 북경 등지에서 한나라시대 유물 등을 집중적으로 구매한 시기는 그 이후인 1918년
(님이 직접 쓰신 댓글에 대정 7년-1918년이라고 언급된 것 안보이세요..??)

세키노가 북경에서 구입한 한나라시기 유물들(낙랑유물들과도 거의 같은)은 이미

평양지역에서 발굴된 낙랑유물들이 중국 한나라시기를 전후한 중국계통의 유물임을

명백히 입증할 증거의 목적으로 구매한 것이란 말입니다. 더구나 당시 세키노가 중국에

건너간 목적이 딱히 낙랑과 관련된 유물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조선전체의 역사와 내지(일본)

의 역사와 관련된 중국유물들을 전반적으로 수집하러 간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낙랑과 관련된 유물 수집은 부수적인 부분에 불과하구요~~~ 

그리고 세키노가 북경 등지에서 구입한 유물들 중 상당수는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일제시기를 통틀어 일본학자들이 중국 각지 및

몽골-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수집한 1,600여점의 목록들의 일부로써 품번까지 갖추고....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낙랑유물과는 완전히 구분되고 구별되는 상태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콜라캔 18-03-27 11:53
   
최소한 글은 읽고 오셨으면 합니다.

세키노 교수가 실제 낙랑을 입증하려고 유물을 구입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게 문성재 박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발굴품이 조작된 것과는 하등 1도 관련이 없습니다. 계속 댓글들이 위치 문제로 비화시켜서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그런 위치문제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 낙랑 발굴 유물이 그런 터무니없는 조작설에 휘말릴만큼 검증되지 않은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그런 것은 그 차후에 생각할 문제들이구요.

또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세키노가 그런 유물들을 구입한 목적이 실제 평양 낙랑설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게 낙랑=평양설이 부정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는 게 상식적입니다.

그건 문성재 박사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깐다면 그들이 왜 그걸 집착하고 입증하려고 했는 지 분석해야하는 과정인거지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해서 '낙랑=평양 아님' 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서민 18-03-27 13:28
   
낙랑은 평양일수가 없습니다. 고조선의 땅을 표시할때도 요하강에 위치했다고 표시하지
평양에 존재했다고 표시하지 않습니다.
               
콜라캔 18-03-27 14:39
   
제 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쓰시면 더 이상 토론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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