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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3 21:37
[한국사] 한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발굴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213  

점제현신사비_날조.jpg

일제가 한민족의 공간적인 축소를 위해 저지른 만행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점제현 신사비'이다그동안 여러 가지 역사의 왜곡사례가 밝혀졌지만, 점제현 신사비의 경우는 사실,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은 중국이 강점하고 있는 만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난하 옆 갈석산(강단이 황해도 수안 이라 주장하는)에 존재하던 점제현 신사비를 평양 근처인 온천으로 옮겨 놓는다. 낙랑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그것도 그 신사비는 사실, 자연암반에 세긴 글을 강제로 끌로 뜯어내어, 대동강변으로 옮겨낸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 내용은, 낙랑 25현 중의 하나인 점제현에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낡은 신사를 복원해서 신에게 바치면서 기원하는 기도문을 조각하여 세운 비석이다. 그 비문의 내용 역시 신에게 현에 사는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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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비석은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비석이다. 특히 이 비석이 서있던 자리야 말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점제현이 낙랑 25현 중의 하나였으니, 이 비석이 서있던 자리가 곧 낙랑군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서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설치했고 고구려가 한사군을 멸망시켰으니, 낙랑이 있던 자리가 고조선이 있던 자리이고 그 자리가 고구려가 있던 자리로서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선조들이 생활했던 영토라는 의미다. 즉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점제현 신사비의 위치가 바로 난하 옆이니 대한민국의 영토는 난하까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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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광활한 만주가 모조리 우리 영토가 되는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가 난하 옆 갈석산에서 평양근처인 온천으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는 북한 학자들이 이미 검증한 바다.

 

그들이 검증한 바에 의하면 점제현 신사비를 만든 화강암의 생성연대가 평양 근처의 화강암 생성연대보다 무려 28백만년~22백만년이 더 오래 됐다고 한다. 그리고 화강암의 구성 성분 역시 작게는 2배에서 크게는 10배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후에 논문으로 게재했다.

 

지금처럼 운송이 자유로운 시대에도 비석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난하 옆 갈석산에서 평양 근처인 온천까지 화강암을 옮겨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여러 가지 요건을 살펴볼 때, 점제현 신사비는 갈석산에 세워졌던 것을 낙랑의 위치가 평양을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옮겨 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점제현 신사비 뿐만 아니라 평양 근처에서 발굴되는 소위 낙랑 무덤이라는 것들에서 출토된 봉니, 갑옷, 동검 등등을 분석해서 북한 학자들은 <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집을 통해서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 근처라는 것은 왜곡된 것이며 낙랑의 위치는 난하 바로 옆 갈석산을 중심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점제현 신사비는 사실, 원 석비와 다른, 탁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이다.

거기다 황당하지만, 온천면 일대는 원래는 바다 밑에 있던 지역이다. , 도저히 비석이 설 수 없는곳에, 세운 것 이다.


점제현.jpg
                                               원본과 다른 탁본 

 

즉 점제현비의 문제는 3가지이다.

1) 갈선산의 암벽에서 강제로 뜯어내서, 평안도 온천면으로 옮겨온 비석이라는 것

(비석의 화강암연대가 평양 주위의 화강암과 안맞고, 비석 옆에는 시멘트로 허술하게 가공)

2)원 비석의 문자와 탁본간의 불일치성(그래서 탁본을 붙인 체로 촬영, 탁본간에 불일치 등)

3)평안도 온천면 일대는 원래, 낙랑군이 존재한 한나라 시대에는 바다밑에 있었다는 것이다.

, 점제현 신사비은 한국 고고학 역사 상 가장, 치졸하고 어리석은 발굴인 듯 발굴 아닌 사기인 것이다.


북한학계의 발표내용) 

①이른바 ‘점제현 신사비’ 기초부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

②돌의 화학성분이 인근 지역의 화강석과 큰 차이

③화학성분에 근거할 때 문제의 돌은 요하지방의 것과 유사
④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인근지역과 2-3천년의 시차
⑤타 지역에서 만들어서 용강으로 옮겨 놓았다는 결론
시멘트 점제현.jpg 
   시멘트 범벅인 점제현 신사비 + 고의로 탁본을 붙인체 촬영(원래는 해석이 불가능한 희미한 비석이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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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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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18-03-23 21:52
   
저것 때문에 국사가 그냥 뒤집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history2 18-03-23 21:54
   
다른건 몰라도,,,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야산의 새겨진 돌을 뜯어와선, 여기가 갈석산이다 하니,,,,,,, 참!
     
남북통일 18-03-23 22:01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얼척이 없어요.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는 사서를 들이밀면 돌아오는 답은
"요하 동쪽은 포괄적인 의미의 요동이라고도 함."이라 하질 않나
낙랑군이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기점에 위치해 있다는 사서를 들이밀면
"그 갈석산은 사실 평양 갈석산이며 만리장성은 한반도 북부까지 내려왔을 수도 있다."
라고 하질 않나.........
쇠고기 18-03-24 01:30
   
저는 낙랑 요동설이나 평양설 둘 중 누가 답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이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평양에서 쏟아져나오는 낙랑계 유물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님 글을 보니 또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꼬마러브 18-03-24 08:34
   
일제 때 발견된 고고학 유물은 조작이고
북한사학계가 발견한 유물은 낙랑국의 것입니다. 직접 발굴한 북한사학계 스스로가 그렇게 규정하고 있죠.

그것을 낙랑군 유물이라고 하는 것은 직접 발굴하지도 않은 한국사학계의 주장이죠.
history2 18-03-24 05:17
   
사실, 이 입장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 드릴 말씀이...아시다 싶이(인터넷만 검색해도 수없이 많은 기사가 나오니) 낙랑의 유물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요...다만, 토기나 죽간,인장  등 상당수는 진품이라고 여겨지는 데요(당연히 그렇다보니 가품도 많지요, 그렇지만 유물들 가품은 원래 흔한 일이니 가품으로 낙랑을 배제하긴 어렵다고 봐요), 또 그에비해 건축적인 부분(왕성이나 치소) 혹은 무덤군 등은 조작 등이 너무 많았어서, 사실 믿기어려운 부분도 많구요...저 솔직히는 낙랑 한반도설과 낙랑 요서설 완벽하게 딱 제 생각에 100% 합당한 이론은 없습니다. 다만 낙랑요서설을 믿고 싶지요(저도 외국생활을 오래했다 보니 아무래도....민족주의 까지는 아니지만 ^^)
history2 18-03-24 05:23
   
그냥 제 입장에서 몇 자 적었습니다.

1)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는 고조선의 위치와 직결되는 문제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토성과 고분, 점제현비가 있고, 유물로는 봉니(封泥), 목간(木簡), 기와 등이있다.

2)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낙랑군 시대의 유적>에서는 '대동강면  토성'을 낙랑군의 토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나라 군사를 상대로 1년 동안 항쟁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토성이다.  사기는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강 유역에는 그만큼 험준한 곳이 없다.
조선총독부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다소 고려가 되는 것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는 점이다. 사면이 트여 있어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어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낙랑치소에서 발견된 한나라 기와 양각양식이고 사실 무제이전 것이고....)

3)강단은 대동강 유역 고분 100여 기를 모두 낙랑군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대동강 유역 고분 2600여 기를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에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리순진은 정백동 2호와 37호 무덤의 상한은 서기전 7세기까지 올라가고 하한은서기전 1세기로 보았다. 고분은 낙랑군과 관계없이 축조된 것들이며 낙랑군의 설치 이후에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일제시대에 발굴한 100여 기의 고분보다 26배나 많은 26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이므로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4)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에서 일제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점제현신사비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점제현은 <한서 漢書> (지리지)에 수록된 낙랑군 25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온천군이 점제현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김교정과 정강철이 신사비의 화강석 성분을 분석한 결과 부근의 화강석과는 크게 다르고, 요하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발굴 과정에서 신사비의 기초에 시멘트를 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전 연세대학교 교수 손보기는 신사비가 있는 곳은 2천 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두 이 신사비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5)유물 가운데 봉니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다. 봉니란 문서가 수신자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봉함하는 진흙이다. 죽간이나 나무에 글을 쓰고 상자에 넣어 묶은 다음 끈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다. 1918년부터 1937년 사이에 대동강 유역에서 봉니 2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모두 일제시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이후에 발견된 것은 한 개도 없다. 북한에서 1969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여 평방미터나 발굴하였으나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6)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년 출생 1950년 납북)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 등을 들어 조직적인 조작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일제시대에 발견된 봉니가 모두 한나라것이라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한다. 낙랑군은 전한, 신, 후한, 삼국시대, 진, 오호 16국 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오로지 한나라것만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7)북한의 박진욱은 관직명이 당시 관직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 등을 들어 봉니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8)대동강 유역의 한 무덤에서 낙랑군의 호구와 인구수를 적은 목간이 발간되었다.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물은 어디나 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창원에 신라장적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신라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9) 단국대학교 교수 윤내현은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중국계 유물이 낙랑군이 설치된 전한(前漢) 때의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후한(後漢) 때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작연대가 표시된 기와나 벽돌 중에는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인 서기후 353년과 405년에 제작된 것도 있다.
6시내고환 18-03-24 20:46
   
이거 이미 날조된거 다 아는 사실이죠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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