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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2 15:35
[한국사] 낙랑에 대한 이덕일 교수의 반론 및 재반론 & 소수의견(주보돈 교수)...(4)
 글쓴이 : history2
조회 : 1,259  

1. 이덕일 교수의 주장(낙랑 요서설)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 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 ()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539) 사망한 한현도(韓顯度)’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간 조선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한국인 후예 식민 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강 남단의 대동면 토성리(土城里) 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천안문(天安門) 남서쪽 20km 지점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식민 사학계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면 토성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인 (대동면)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樂浪郡治)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임이 그 유적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낙랑군고’ ‘한국 고대사 연구’)라고 쓴 것을 지금까지 추종한 결과이다. 이병도 씨가 말한 일본인 조사단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뜻하는데, 그가 대동강 남쪽에서 일부 중국계 유적유물을 찾았다고 주장하자 조선사 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이곳을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313)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으면서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에는 그 119년 후인 연화(延和) 원년(432)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 6군 사람 3만 가()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9년 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119년 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태무제가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평양까지 가서 낙랑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은 이상 낙랑군은 중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 고대 역사서 및 지리지를 토대로 작성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북쪽 40리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조선성이 낙랑군 조선현을 뜻함은 물론이다.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던 낙랑군 조선현이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약화되었다가 북위(北魏) 태무제가 북경 부근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다.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같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계속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북경시 북쪽 순의구(順義區)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적했듯이 지금도 고려진(高麗鎭)과 고려영(高麗營)촌이 있다. 조선 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매국의 역사관, 즉 식민 사관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한사군이 처음부터 중국 내에 있었다는 문헌 사료와 유적, 유물은 무수히 많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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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덕일 교수 의견에 대한 재반론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313년 이후의 자료들이다. 그런데 313년 이후 낙랑군은 요서로 교치되어 졌다. 그러니 313년 이후의 낙랑군에 대한 사료들은 당연히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덕일은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각종 사료에 등장하는데 식민 사학계는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한다고 비웃고 있다. 하지만 사학계가 313년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의 낙랑군만을 가리킬 뿐이다. 313년이후 낙랑군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덕일의 주장은 313년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축출된 후 요서 지방에 새로운 낙랑군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알고도 우길수도 무식한 주장일 뿐이다. 낙랑군이 313년에 미천왕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낙랑군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313년 이후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물론 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던 그 낙랑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멸망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에게로 갔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새로 만들었다(이른바 교치).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그후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고 이때쯤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에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3. 소수의견 (낙랑국, 낙랑군 공존설)


경북대학교의 주보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절충적 가설을 주장하였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엄연히 다른 정치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모두 평양 부근이었으며, 아마 둘이 공존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서는 낙랑국 점령의 기사가 낙랑 점령의 기사보다 5년 일찍 별개의 기사로 나온다. 낙랑군과 낙랑국이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문제나 낙랑 태수중에 보이지 않는 '최리'라는 이름 등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낙랑군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국가 체계도 정비한 나라가 중국 기록에 전혀 안 나온다는 점을 풀어야 하는 난점이 있다.

낙랑군의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문제가 두드러지지만, 사실 낙랑군의 바로 옆이 아니라도 같은 문제가 있다. 중국 측 기록에 마한에 속하는 작은 나라의 이름들까지 나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단순히 한반도에 관심이 적었다거나 거리가 멀어서 교류가 없어서라고 하기는 어려워서다. 그러므로 이 가설이 옳더라도 아마 그다지 공존기간은 오래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정한다. 주보돈 교수가 신라사 전공이라는 점에서도 마이너스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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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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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3-22 17:29
   
이덕일 소장은 토론 상대자인 윤용구 박사의 다음 지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한서>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은 <한서>에 주를 붙인 거예요. …이건 <후한서>의 기록이 아니에요. 여기 주가 달려 있는… 괄호 친 건 다 ‘주’예요.”

알고 보니 이덕일 소장이 ‘1차 사료’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자료는 한나라 존속 시기에서 수백 년 지난 당나라 때 사람 안사고나 이현 등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니었다.
     
삼바 18-03-23 08:53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험독현(險瀆縣),[4]
[4]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王)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此)은 자연적으로(自) 올바른(是)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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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문의 시대
應劭==후한(동한)시대 인물/ 험독현에 처음 주석을 단 인물(AD 200년 전후)
臣瓉==서진(AD 265~316)대의 인물
顔師古==당나라 초기 인물(AD 58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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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독현 주석에 나오는 3인은 안사고만 후대의 인물이고, 응소와 신찬은 낙랑군 존재 당시의 인물입니다. 비록 주석이라할지라도, 1차 사료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윤용구의 한마디로 한순간에 무녀졌다고 하는 소리는 사실과 다릅니다.
원문 제시하면서 그안에 주석까지 소개한걸 트집잡아 후대의 인물만 주석을 단것처럼 말한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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