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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22 15:21
[한국사] 낙랑에 대한 현재 강단의 입장(통설)...(1)
 글쓴이 : history2
조회 : 592  

낙랑군에 대한 강단의 시각(통설): 초기 낙랑군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면서 '시도는 했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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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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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다른 군현은 임둔,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옛 임둔군 지역인 '영동 7'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군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낙랑을 두려워 했다는 기록, 초기 백제와 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 때인 25년 토인(土人,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중국의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하여 독립 세력을 일소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그 말은 낙랑군이 폐지된 시기가 있었다는 의미)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지는 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과 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3세기 중엽에는 위나라의 관구검이 공손씨의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했고, 낙랑 · 대방군이 삼한 8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마한 세력이 반발하여 군현을 공격했으나 낙랑이 그 루트를 타고 가서 역습했다.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히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백제의 공격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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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반에는 위(삼국시대)가 멸망하고 서진이 세워진 뒤 팔왕의 난과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병합되었다. 서구 학계에서는 이 313년을 한국사의 시작(구체적인 국가 형성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미천왕은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한반도의 한사군 축출을 완료했다. 물론 낙랑군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세기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교치된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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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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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 18-03-22 17:33
   
‘한나라가 요동 왕검성을 무너뜨린 뒤 평양에 낙랑군 치소를 따로 설치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논문의 주장은 도발적이다. 기존 왕검성 대동강 북안설과 요동요서를 포함한 고조선 강역 논란 등을 검토하고, 최신 고고자료를 종합한 결과 평양성은 왕검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라고 단정했다. 근대 발굴이 시작된 이래 10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껏 평양에서 고고학적 물증이 안 나왔다는 게 근거다. “1905년 경의선 부설로 평양역 부근을 굴착한 이래 대성산성, 청암리토성 등 대동강 북안의 조사가 진행됐으나, 왕성으로 볼 만한 어떤 유적, 유물도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잣대는 왕성 성곽의 자취다.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 한나라에 복속된 남월국(베트남)도 왕성 성곽이 중국 문물들과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조선도 성곽 중심으로 실체를 검증해야 한다는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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