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부분과 왼쪽 아래 부분이 일부 마멸되었는데(광복 후 마멸된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함), 현재 남아 있는 비는 높이 92.4㎝, 너비 45㎝, 두께 20㎝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가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마운령비와 거의 일치하는데, 유교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역수(曆數)의 관념을 비롯해 건원(建元)·짐(朕)·순수(巡狩)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제왕(帝王)으로서의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또한 진흥왕의 변경 지역 순수에 수행된 신료(臣僚)들의 이름과 관등·관직은 신라의 정치 제도와 인물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이 비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에서 발견되었는데, 1852년(철종 3)에 당시 함경도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황초령 정상의 원 위치에서 고개 남쪽인 중령진(中嶺鎭) 부근, 즉 하기천면 진흥리로 옮겨 비각(碑閣)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북한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이 비와 마운령비가
실제로 신라의 동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즉, 신라 때의 동북 경계를 안변의 남대천(南大川) 유역으로 보고, 어쩌면 황초령비는 그 부근인 철령쯤에
세웠을 터인데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이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정복한 뒤 9성(城)을 쌓을 때 그 점령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철령에 있던 비석을 함흥평야의 북쪽 경계 요충지에 해당하는
황초령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려 고종 때의 승려인 천인(天因)이 지은 「고석정기(孤石亭記)」에 진흥왕의 한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쯤 되는 고석정 부근에 있다고 한 기록을 들어, 황초령비는 바로 고석정에 있던 비석을
조선 초기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이처럼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황초령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함남 이원군,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 568)
太昌元年歲次戊子▨▨卄一日▨▨▨興太王巡狩▨▨刊石銘」
記也」
夫純風不扇則世道乖眞化不敷則耶爲交競是以帝王建号莫」
不修己以安百姓然朕歷數當躬仰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
愼恐違乾道又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祇應符合笇因斯四方託」
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自惟忖撫育新古黎庶猶謂道」
化不周恩施未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
勞賚如有忠信精誠才超察厲勇敵强戰爲國盡節有功之徒可加」
賞爵▨以章勲勞」
引駕日行至十月二日癸亥向涉是達非里▨廣▨因諭邊堺矣」
太昌元年 진흥왕의 연호 : 서기 568년
邊堺 변경 지역
진흥왕때에 실직과 하슬라주를 공격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볼때, 이미 신라의 영토였다고 볼수있죠.
정복기념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순수비.
실직(삼척군) 과 명주(하슬라주)는 두만강에 가까운 함경남도 일대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발해-신라 국경의 경계선인 니하는 두만강이란 추정까지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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