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21 11:17
[한국사] 광개토대왕 비문분석....결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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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광개토대왕, 구리시 앞 기념광장에서는 광개토태왕, 『삼국사』에서는 광개토왕 등 여러 가지 호칭으로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이 비가 어떤 성격의 비인지에 대해서도 묘비 또는 릉비(陵碑, 영희·이유립·이형구·박시형 등), 훈적비(문정창 등), 석비(김덕중), 고비(古碑) 또는 그냥 비(碑, 나머지 다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따로 발견된 수묘비가 있으므로 능비는 아니고 장수왕이 아버지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훈적비’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둘째, 일본의 비문 조작이나 왜곡에 대한 연구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간 신채호, 문정창, 이유립, 이진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군부세력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만들고, 일본이 침략당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비의 내용 중 없어져야 할 글자는 의도적으로 파내고, 필요한 글자를 만들어 넣는 등의 조작을 했다’고 주장해왔으나 정작 우리나라 제도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중국이나 일본 측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 현재의 제도권에서는 이 훈적비의 원문을 찾는 연구가 전무하다. 현재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없어진 글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기존의 탁본과 석문을 정밀하게 비교·연구 한다면 원문에 상당히 가까운 석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1880년 재발견 후 처음으로 탁본을 하여 해독문인 석문을 처음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주인 영희 조봉(榮禧 莜峰)이 1903년에 발표한 『고구리영락태왕묘비문고(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라는 석문에는 결자가 15자에 불과하며, 같은 만주인인 김육불(金毓黻, 1887~1962)이 1934년 『봉천통지(奉天通志)』 금석편에 게재한 석문에도 일본인이 판독하지 못했거나 판독할 수 없다고 했던 글자의 다수가 판독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귀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이 최소한 8개 정도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들을 정밀하게 비교ㆍ연구한다면 어느 정도 원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비 제도권 사람들이 찾아놓은 원문이 이미 오래 전에 발표되어 있는데, 이들이 그 글자를 그렇게 해독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참고가 될 수 있다. 1903년 일본이 우리나라 찬집청에 비문의 석문을 싣도록 압력을 넣는 과정에서 정3품의 자리를 박차고 퇴직한 후 현지에 가서 연구를 하여 원문을 복원한 창강 김택영(1922년), 그 제자로서 이를 보완한 소앙 조영은(1932년), 그리고 원석 정탁본과 영희 및 앞 두 사람의 연구를 종합하여 고구리 한문(필자는 태학사문이라 함)으로 해석한 연구 결과를 2014년 초에 발표한 김덕중 등의 자료가 있다. 또한 1926년에 석문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수와 이를 조금 보완하여 1987년에 내놓은 이유립의 석문도 있다. 그런데도 제도권에서는 이들의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원문을 찾으려는 연구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고구려식 서술 어법으로 해석한 연구가 거의 없다. 김택영의 『한국역대소사』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비문을 발견하고도 그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고 만주인인 영희 조봉이 부분적으로나마 해석했다고 한다. 중국의 문사들이 해석을 하지 못했다면 중국식 문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덕중 외에 대부분 우리나라의 제도권이나 비 제도권 학자들도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과 똑 같이 현재 또는 중화식 한문법으로 해석하면서 구두점의 위치 등을 토의하는 선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르게 해석하게 되어 김덕중의 고구리 한문식 해석도 여러 해석 중의 하나로만 취급되고 있을 뿐 권위 있는 원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고대 우리글을 우리의 고대 어법이 아닌 현대 중국식 어법으로 해석하려니 해석이 어렵게 되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하여 고한문과 고구려 서글, 우리 옛말의 서글 표현 등에 대한 연구와 함께 진행한다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해보고자 비 제도권의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여 ‘호태왕비문연구회’를 구성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재정과 능력이 모자란 상태에서 완벽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는 어렵고 시간도 더 필요하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서 상당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성과는 있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은 『삼국사』(소위 『삼국사기』, 1145 출판)보다 731년 앞선 기록이고 『삼국사』의 원본이 없어진 데 비해 260여자의 결자가 있으나 대부분 원형이 보존된 비문이라는 점, 당시의 고구리인이 쓴 고구리 역사이므로 중국의 기록과 다른 주체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식 서글이 아니라 우리나라식 서글(김덕중은 이를 詞文이라 했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주체적 가치는 실로 엄청나게 높다.
회칠이 떨어져 내리는 비석
그런데 이 비가 재발견된 1880년경으로부터 136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의 주인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중요한 사료에 대한 충분한 연구 논문의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아직 비의 이름도 능비, 훈적비, 석비 등 다양하고, 태왕의 칭호도 대왕 태왕 왕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으며,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비문을 변조했다는 이진희, 문정창, 이유립 등 여러 사람들의 보고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다.
5) 결론 ‘광개토대왕비’ 의 중요성 정부와 강단 학자들은 변조 또는 마멸된 글자의 원문도 찾지 않았으며, 해석을 위한 당시 사람들의 서글 어법 등에 대한 연구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안타까움을 느낀 사람들이 국사찾기협의회와 (사)한배달을 중심으로 2014년에 모여 정부와 학자들에게 자극을 줄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라도 새로 해보기로 합의하고 나름대로 분야별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호태왕비문연구회’를 결성하여 자체 연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조 또는 탈각되기 전의 원문을 찾고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여러 탁본 중 대만 소장의 원석탁본과 일본인들이 칠한 백회가 떨어져 나가 더 많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게 된 1889년대에 채탁된 것으로 알려진 길림성 주운태의 탁본을 확대 복사하여 공유하고, 여러 책에서 중국, 북한 및 일본 학자들의 석문 16개와 해석문 7개(재중 동포로 고문에도 능한 윤덕원 선생의 해석 포함)를 찾아 비교 연구를 위한 자료집으로 제작했다.
이상 학술지와 위키 등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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