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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8 23:27
[기타] 흑룡회를 알아야 하는 이유!.....(1)
 글쓴이 : history2
조회 : 2,193  

이 흑룡회 의 사상이, 현대에는 의외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데, 바로 동이족 문명론, 동일혈통론(동조동근론)은 이후 이유립과 문정창 등 초기 유사역사학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 흑룡회는 독도침탈에 가장 공이 큰 조직이며 일진회를 사실상 조종한 단체로 지목된다. 

실제, 이들은 아시아의 혁명론자 즉, 김옥균 부터 쑨원, 아기날도 그리고 아웅산 장군에 까지 전 방위적으로 자금을 지원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흑룡회(黑龍會, 일본어: 黒龍会 고쿠류카이,Black Dragon Society)는 제국주의 일본의 국가주의 우익 조직으로, 1901년에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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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료헤이 

1) 메이지 유신과 낭인의 잉태:  메이지 유신은 사츠마, 조슈 두 번()이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테러와 암살, 음모와 배신, 내란과 내전으로 점철되었고, 피의 보복이 난무했던 일본의 지배권을 노린 쿠데타 였다. 메이지 유신 후 1885년 구성된 이토 히로부미 내각 각료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조슈와 사츠마가 각4명으로, 10석의 각료 중 두 개의 번에서만 8석을 장악하여 일본의 권력을 철저히 농단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의 독과점 형태는 그 후에도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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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회 상징 

승자가 축배를 들고 있는 사이, 다른 한편에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도박판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를 조슈와 사츠마의 두 번만의 차지가 된 것을 본 여타의 번들은 유신의 대열에 참여할 시기를 놓치고는 당황해 했다. 사츠마와 조슈의 주도 그룹을 번벌(藩閥)이라고 하며 여기에 들지 못한 이들을 비번벌(非藩閥)이라고 부른다.

이들 비번벌(非藩閥) 그룹 중에는 동일한 형태의 내전인 제2의 메이지 유신이 한번 더 일어나기를 바라는 번()도 있었다.

 

다음은 메이지 유신 후 사무라이들의 불만으로 일어난 무장반란인데 그 중심에는 권력투쟁에서 탈락한 유신 지도자들이 있었던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반란의 근저에는 유신지도자들 사이의 반목과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사가의 난 (佐賀1874)

시부렝의 난 (神風連1876)

아키즈키의 난 (秋月1876)

하기의 난 (1876)

세이난 전쟁 (西南戦争1877)

 

여기에서 하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큐슈에서 벌어진 군사반란이었다. 사가의 난에서는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하기의 난에서는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를 비롯하여 많은 숙생(塾生: 쇼카손주쿠의 학생)과 명치유신 사상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의 친족들이 대거 개입하였다. 에토와 마에바라는 유신정부에서 장관에 해당하는 참의(參議)로 있었으며 둘 다 유신의 서열 10위에 들어가는 거물들이었다.

 

이들 무장반란 외에도 불평 사족(士族, 사무라이층)이 일으킨 요인 암살 사건이 많았다.이러한 유신 지도자들 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하이라이트는 서남전쟁(세이난전쟁)이다. 이 전쟁은 정한론(征韓論)의 기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 반란을 직접 주도하였다. 또 몇 년간에 걸친 사전준비도 있었다.

 

서남전쟁은 유신으로 벌어진 내전 중 가장 대규모이자 참혹한 싸움으로 메이지 유신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13,000명의 무장반란군이 큐슈의 남단 사츠마에서 신정부군의 거점인 구마모토를 향해가는 동안 큐슈 각지의 불만에 가득찬 사무라이들이 가세하여 그 병력이 3만을 넘어섰다.

 

이 반란을 철저히 또 잔혹하게 진압한 메이지 신정부는 반란의 괴수 사이고와 함께 유신을 이끌어왔던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유신의 완성과 정상에 이르기까지 달려오면서 반 이상이 비명횡사하여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남았는데, 그간 극한의 시련과 고통에서 터득한 책략과 음모에 달통한 사람들로 후발주자의 도전에 대하여 쉽게 기회를 내주는 바보들이 아니었다.

사츠마가 주동이 된 무장반란인 서남전쟁에서 반유신의 세력들이 타도되자, 결국 야인을 벗어나지 못한 큐슈의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일본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다. 국내에서 적합한 진로를 찾지 못한 이들이 일본 바깥에서 또 다른 판을 찾아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현양사와 흑룡회로 대표되는 일본우익의 길이다.

이들은 통칭 낭인이라고 하며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이 많은데, 우리말에서와 같은 부랑자의 의미가 아니며 일본에서는 정치가로 분류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들 낭인의 그룹을 실직한 무사 또는 정치적 야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가 쉽게 와 닿을 것이다.

 

 

흑룡회(黑龍會) Black Dragon Society

현양사(玄洋社) Black Ocean Society

 

 

두 조직의 영어명 첫머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Black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이들의 행적과 그 내부세계는 그야말로 깜깜하고 음습하며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2) 흑룡회의 탄생:  1901223, 한반도를 주 무대로 하는 천우협(天佑俠)의 일원인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 등이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낭인들을 모아 '흑룡회'라는 우익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満)의 겐요샤(玄洋社, 현양사)의 해외공작 담당그룹이었다고도 한다. '흑룡'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일본 제국이 흑룡강(黑龍江, 아무르 강) 일대의 주도권을 차지하도록 지원함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주간(主幹)이 되었고, 도야마 미쓰루는 고문이 되었다.

 

3)흑룡회의 성격:  초기 흑룡회는 현양사와 달리, 폭력적인 요소에 거리를 두는 노력으로 낭인들 외에 내각의 장관과 군부 고위층 관리를 회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점차 범죄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흑룡회는 흑룡이라는 기관지를 간행하였고, 정탐 요원을 양성하여 파견하기 위한 학교를 운영하여 만주, 한반도, 중국 등지에서 대()러시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에 강력한 외교 정책을 펴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4)흑룡회의 대 아시아 정책 :  흑룡회는 대아시아주의를 지원하여, 쑨원(孫文)이나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같은 혁명론자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는 일본제국 육군이 흑룡회 조직을 첩보, 사보타주, 암살 등에 활용하였다. 흑룡회는 거짓 정보와 선전을 퍼뜨려 일본 군부와 관련된 심리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군대의 통역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첩자인 아카시 모토지로를 지원하기도 하였고, 아시아의 불교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흑룡회는 한국 병탄(韓國倂呑)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 일진회(一進會)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병탄 이후에는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한국인 학살을 주도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다.

 

흑룡회의 영수 우치다 료헤이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중국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했다. 그가 신해혁명 기간에 쓴 "중국개조론"에서 "일본은 열국(列國)을 지도하여 중국을 개조하는 주도권을 장악해야 하고, 공화 정치를 건설하는 일을 찬성하는 방법으로 중국이 과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힘껏 고취했다.

 

그리고 191410월에 기초한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더욱 철저하에 그가 중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망령된 의도를 드러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이 비밀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되 조건을 걸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 일본은 중국의 남만주· 내몽고· 산둥· 푸젠 등에서 특수한 권리를 누리고, 중국의 군대· 군수공장· 해군· 재정· 교육 등은 모두 일본에게 위탁 처리하고, 중국이 타국에 차관, 조차지 임대, 영토 할양을 할 경우 반드시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의견서는 뒤에 일본 정부가 위안스카이 정부에 제출하여 중국을 멸망시키려 했던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

 

1920년대 ~ 1930년대에는, 주류 정치단체로 성장하여, 공공연하게 자유주의와 좌익사상을 공격하였다. 이 시기의 회원 수는 수십 명 정도가 넘지 않았으나, 정부와 군부, 재계의 유력인사와의 밀접한 연계로 다른 초국가주의단체보다 훨씬 큰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초기의 목표였던 러시아에서 유럽과 미국은 물론, 에티오피아, 터키, 모로코, 동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1931년에 파시스트 단체 '대일본생산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 패전 후 GHQ에 의해서 강제해산되었다.

 

5) 흑룡회의 해체와 부활:  흑룡회는 1946년에 미국 점령 당국의 명령으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1961, 우치다 료헤이 작고 25주년제를 계기로 하여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보급한다'는 취지 하에 다이토주쿠(大東塾) 숙장 가게야마 마사하루 등을 제창자로 하여 흑룡구락부가 재결성 되었다. 그러나 흑룡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며 실제로는 우익단체가 아닌 우익지도자의 친목회로 흑룡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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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몇몇 논객의 흑룡회에 대한 의견:  다만, 몇몇 논객들은 이 흑룡회 의 사상이, 현대에는 의외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데, 바로 동이족 문명론, 동일혈통론(동조동근론)은 이후 이유립과 문정창 등 초기 유사역사학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7) 흑룡회의 정식 부활:  2008년에는 흑룡회 초대회장 히라오카 고타로의 증손자인 다나카 다케유키를 중심으로 정식으로 흑룡회를 부활시켰다. 초대 흑룡회가 제창했던 아시아주의 개념을 확장시킨 유라시아주의 를 제창하고 있다. 일반적인 우익단체는 패전 이후에 결성되거나 실정에 맞게 변형되어 왔으나, 흑룡회는 1946년에 해산한 초대 흑룡회의 부활을 제창하고 결성된 관계로, 쇼와 시대의 우익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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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3-19 11:54
   
[1930년대에는, 초기의 목표였던 러시아에서 유럽과 미국은 물론, 에티오피아, 터키, 모로코, 동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1931년에 파시스트 단체 '대일본생산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 패전 후 GHQ에 의해서 강제해산되었다.]
.
.
1930년대 접어들면 이전 흑룡회가 후원했던 쑨원은 몇 년 전에 이미 죽고, 장제스 또한 중국의 대부분을

석권해 가면서....오히려 과거 장제스와 일본 그리고 흑룡회와의 관계와 거리를 두는 차원을 넘어

청산하려 들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인해 흑룡회의 대아시아주의는 근본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들어 흑룡회는 아시아를 넘어선 보다 먼 세계여러나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 및 유사사학자들에게 유행이었던 투라니즘

(동유럽-러시아-중앙아시아-몽골-만주-조선-일본이 모두 범투르크민족에 속하는 한 뿌리라는...^^

-어쩌면 환빠들의 논리와 놀랍도록 유사한지....^^-)의 범주에 아프리카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독립을

유지해오던 에티오피아까지도 들어간다는 어거지논리가 흑룡회를 비롯한 일본우익단체에게 확산되었습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한때 일본과 에티오피아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듯 했지만...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점령당하고,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 당위성 확보차원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을 인정하게 되면서... 결국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고...

2차대전 와중에 이탈리아로부터 에티오피아를 되찾은 에티오피아황제는 오히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물론 임정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것과 같은 상징적인 측면에 불과한 것이지만.....
history2 18-03-19 11:57
   
추가 정보  감사합니다...제가 쓴 글에도 언급은 했지만, 1930년대에는 이미 일본 내에서도 인정을 못받는 단체로.....그런데도 우리나라 에서는 명성황후 시해나 독도 등의 문제로 나름 크게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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