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극 연개소문을 요즘 정주행 중인데 그중 한 편을 보고 느낀게 있어 남긴 댓글을 가져와 봤습니다.
고건무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범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모르는 분들이 있는것 같아서 설명을 하자면 군인이었을때는 유능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무능했던, 샤를 드골-그랜트-이존욱 같은 인물이 고건무입니다. 그가 태왕이었을때 고구려의 경제력이 피폐해진건 사실이지만 도박이 필요했었던 상황입니다. 아직 기반이 약했던 당나라를 치는것이죠. 물론 멸망시키는건 고사하고 장안까지 진격하기도 힘들었겠지만(한마디로 성공을 기대 못하는 상황) 고구려의 기상을 일단 떨치고 당나라를 위축시키며, 무엇보다도 괵튀르크나 티베트같은 주위의, 고구려에 협력 할만한 세력들과 손을 잡거나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어찌됐습니까? 괵튀르크는 멸망당했고 티베트는 군사적으로 굴복했죠. 그리하여 당나라가 쳐들어왔을때 동맹국으로 써먹을 만한 세력은 백제나 철륵, 일본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도움을 별로 못받았죠. 만약 고구려가 당나라를 침공해서 잠시간만 농성하고 돌아왔더라면
1. 일단 당나라 침공
2. 성 몇개쯤 함락한 다음에 농성함
3. 이걸 본 괵튀르크와 티베트가 기가 살아서 당나라를 역시 침공(이게 핵심)
4. 그들이 당나라와 분명 각축을 벌일것임
5. 그때 고구려는 발을 빼서 경제력을 기름
이렇게 이야기가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건무가 한짓이 뭐있습니까?
1. 도교 수입해서 문화적으로 종속당함
2. 전승 기념탑 경관이 박살나는데 암것도 못함
3. 태자를 입조시켜서 굴욕 자처함
4. 강경파를 위축시키고 친당파를 육성시켜 고구려의 기상과 사기를 떨어뜨림(그럼 어느 백성이싸울 맛이 나겠나)
5. 어차피 쳐들어오게 되있는 당나라를 쳐부술 기회를 포기함
6. 쓸데없이 남방을 침략해서 저항을 부름
7. 봉역도를 바쳐서 정보면에서나 자존심 면에서나 패배를 당함
경제력을 회복시키는게 진정 목적이었으면 저런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대등하게 맞서서 제국 대 제국의 판도로 협상을 했어야 했는데, 영류태왕대야말로 한국과 중원의 균형추가 기운 역사적인 시기입니다.
그리하여 참다못해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뒤엎었지만 때는 늦었고 최선책으로서 도박(당군을 끌어들여 이세민을 아예 생포해버림)을 행했지만 실패. 국력이 파탄남으로써 고구려는 사실상 멸망 확정, 진작에 그가 정권을 잡았으면 전체 백성의 절반이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중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며, 고구려를 멸망시킬수 있는 것은 백두산 말고는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당나라에게 일시적으로 굴복했던 티베트와 튀르크(위구르 칸국으로 대체)가 훗날 별 도움없이도 혼자서 당나라를 침공해 중원을 그들의 놀이터로 만든걸 생각하면 더더욱 이 실책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결론: 고건무 이 놈은 형제국인 괵튀르크가 당에게 망하게 놔두고 자국도 멸망의 블랙홀로 빨려가게 만든 민족의 역적이다.
당시,,,대당 친선정책을 펼친건, 돌궐과 고구려의 긴장관계도 한몫 했습니다...먼저 1)평원왕 때, 돌궐의 고구려 공격2)여수전쟁 때, 돌궐의 수나라 지원 및 고구려의 지원세력인 거란정벌 3)당-돌궐 전쟁때 돌궐의 원조요청을 고구려가 거절 등 으로 보면, 돌궐을 고구려가 상당히 경계했다고 볼 수 있고, 당나라는 현무문의 변 등 왕자의 난으로 소란 스러워서, 고구려로서는 잠시 고수전쟁 때, 청야정책으로 약화된 국력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중성 전쟁 등을 통해 신라를 먼저 복속해야 할 필요성 있었습니다......한강유역은 당고종 때, 고당전쟁에서 보듯 제2 보급선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고덕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덕무를 위한 변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