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친구님의 의문에 대한 답글(2)
(1)감방친구 18-03-10 16:49
“요사 지리지 해당 내용은
동경요양부를 설명하는 것이지 동경을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동경요양부, 부의 연혁을 설명하고 있고
'요나라 동경이 이곳이다'는 고구려 평양을 서술하는 것이죠
기자조선, 위만, 한무제, 한사군, 공손씨, 모용씨, 광개토태왕~~ 이렇게 동경요양부의 연혁을 설명하다가
요 동경=고구려 장수왕 평양=위 사신이 방문한 그 평양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죠.”
답변; 《요사》<지리지>의 내용은 『요나라의 동경이 본래 이곳이다』(遼 東京本此)의 『此』는 앞의 광개토왕이 거주하던 곳과 이오(李敖)가 방문한 곳을 통틀어 말한 것입니다.
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本此.
그러나 《요사》 편찬자가 말하는 요지(要旨)는 양쪽이 같은 1곳으로 보고 양평이 고구려의 치소인 평양성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감방친구님은 『요 동경=고구려 장수왕 평양=위 사신이 방문한 그 평양』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앞에서 광개토왕 거소(居所;양평)을 언급할 필요가 없죠.
《요사》 편찬자가 양 곳을 동일지역으로 본 것(비록 잘못이기는 하더라도)은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비문》에 비려(碑麗) 정벌을 마치고 귀환 길에 『양평도를 거쳐 왔기 때문에』(因過襄平道)
『동쪽으로 …역성(力城)·북풍(北豐)을 거쳐 ( 평주목의 치소인 양평에 도착합니다.)』라고 해석되어야 할 곳을,
왕건군〔1985, 국역본 《廣開土王碑硏究》, 역민사, 301쪽.〕은 “호태왕은 그곳(비려;독산 주)으로부터 돌아오면서〔양평도가 가깝기〕 때문에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力城·北豐에 이르러 〔자기 국경에 들어섰다〕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멋대로 『因過襄平道』를 의역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해석이다.
『因過襄平道』란 “양평도를 거쳤기 때문에 동행(東行)하여 …역성·북풍을 지나 최종 귀환처인 양평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왕건군은 “요양을 옛날에 양평이라 칭했음. 양평도는 요양에서 고구려에 이르는 길. ………역성·북풍은 지금의 집안 서북일대. 북풍은 그 뒤 발해의 서경 압록부 소속의 풍주.”(왕건군 앞의 책, 301쪽 주10·11.)라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평도는 『양평으로 향하는 길』이지 『양평에서 집안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당시의 광개토왕은 망우하 북쪽에서 내려오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평도인 …역성·북풍을 거쳐 양평에 도착하였다는 의미이다.
왕건군에 있어서는 양평의 동쪽에 역성·북풍이 위치하지만 비문이 말하는 실질적 의미는 양평의 서쪽(아마도 요하 서쪽)에 역성·북풍이 있다는 것이 된다.
왕건군은 또 망발을 퍼붓는다.
“고구려 호태왕 때에는 아직은 요동을 점거하고 있지 않았으며 혼강(지금의 환인과 집안 사이를 흐르는 강; 독산 주)을 경계선으로 하여 서쪽 경계를 삼았다.
따라서 역성과 북풍은 혼강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이는 개별적인 사서의 오기(誤記)를 근거로 하여 보지도 않고 억지로 자기 논리에 맞추어 ……《양서(梁書)》와 《삼국사기》의 개별적이고 확실치 않은 조목을 근거로 해서 고구려가 4세기 말 요동을 점거하였다고 하나 …그 시기는 빨라야 5세기 30년대를 초과할 수 없다.”운운 하고, 계속해서 《삼국사기》(광개토왕 14년조)를 모용희 부부의 요동성 공격 때의 『輦』과 관련된 기사를 트집 잡아 “이는 후제(後齊)의 고위(高緯)가 진주(晉州)를 공략할 때 생긴 이야기인데 어찌하여 모용희의 기록에 끼어들어 갔는지 알 수가 없다.”(왕건군, 앞의 책, 229쪽.)운운 하며 스스로의 지식이 천박함을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듯이 《삼국사기》의 모용희 관련 기사는 《자치통감》에 그 연원을 가지는 것이며 그 이전으로 소급하면 《진서(晉書)》<慕容熙載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용희가 요동성(양평)을 공격했던 것은 양평이 고구려의 수중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억지를 부리지만 이미 중국 측 사서가 이를 확인시켜 준다.
(2)고구려 광개토왕의 치소가 양평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기사는 또 있다.
《송서》<고구려전>의 “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高句驪王高璉, 晉安帝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라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지금의 治所는 한의 요동군(양평)이다. 고구려왕(즉 장수왕)이 진(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즉, 413년. 장수왕 원년)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 봉표하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비록 장수왕 원년에 해당하는 기사이지만, 선왕(先王; 광개토왕)의 치소인 양평에 있었을 때이다.
때문에 『今治漢之遼東郡』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삼국지》<한전(韓傳)>에 『辰王治(月)〔目〕支國』과 같은 용법이며, 『진왕은 목지국을 다스린다.』가 아닌 『진왕의 치소는 목지국이다』로 해석해야 할 개소이다.
《요사》의 편찬자로서는 장수왕(15년)의 한반도 평양 천도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북위의 사자 이오(李敖)가 방문한 『평양성』을 광개토왕이 치소로 하였던 『양평』과 같은 장소인줄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감방친구님은, 『평양성=요나라의 동경』이라는 주장이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북위의 사자가 방문한 곳은 『한반도의 평양』(장수왕 15년에 천도)이 요나라의 동경이라는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 됩니다.
물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요동의 평양이라고 하는 국내 일부의 주장이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관련하여 북위 역도원의 《수경주》<패수편(浿水篇)>에 실려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그 지역(왕험성)은 지금 고구려의 치소(평양성)가 있는 곳으로, 내(역도원)가 고구려에서 북위로 들어온 사신에게 물어보니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 내용은 많은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나중에 따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결론만 말하면 역도원의 말에도 역시 오해가 섞여 있습니다.
즉 당시 고구려의 번사가 방문하였을 때, 역도원이 물어본 결과 당시의 도읍인 평양(한반도)이 패수(즉, 대동강) 북쪽에 있었던 것까지는 옳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도원이 오해한 것은 이 한반도의 패수(대동강)를 낙랑군 내를 흐르는 요동지역의 『패수』(고구려의 薩水, 혼하), 또 위만이 건넌 요서지역의 『패수』(지금의 대릉하)와 모두 같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신찬의 설(패수의 남쪽, 혹은 동쪽=조선현=왕험성)을 신봉하는 양수경으로 하여금 역도원이 말하는 패수의 북쪽(패수지양)에 있는 평양이 왕험성이 될 수는 없다(패수의 남쪽=조선현=평양)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양수경의 주장은 《괄지지》나 《후한서·주(注)》가 『평양성=왕험성』이라고 말하여 후인들 모두가 이를 무분별하게 전거(典據)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님 코끼리 귀 만지기』와 마찬가지로 선학의 주장에 대한 시비가 확실치 않은데서 온 비극이다.
이와 관련하여 『왕험성=험독』이라는 응소·『응소설을 독단』이라고 비판한 신찬의 설에 손을 들어준 안사고·이도 저도 아닌 『중립설』의 《색은》·그리고 당대(唐代)의 많은 주자(注者)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그 시비를 논하는 청대(淸代)의 학자들,
그 주장을 일일이 논박하기에는 허락된 지면이 아쉽다.
다만 이곳에서는 역도원이 《수경주》를 편찬할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한반도의 평양성이 틀림없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