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쟁사에서 등장하는 도하처(渡河處)인 요하 동안(東岸)의 요수(遼隧)현은 요동군의 남계(南界)임을 밝히고 있다(삼국지 명제기와 무구검전).
이는 요하 하안(河岸)에 요동군의 남계인 현이 있다는 의미로 중국 학계에서 한(漢) 요동군을 요동반도 남단지역까지 비정하는 설이 잘못임을 말해줌.
이로 인하여 낙랑군은 설 자리를 잃고 한반도로 들어오게 됨.
지금까지 발견된 연북장성의 주향선은 적봉-오한기-나한기를 잇는 선상에 있다.
이 주향선을 안쪽에 위치해야 할 요동군의 속현들이 모두 발해안이나 요동반도까지 집중비정되고 있는 것은 현 발굴되어지는 연북장성 유지와 너무 동떨어져 있음.
장성 이남 가까운 지역은 결과적으로 공지(空地)가 되어 버림.
한 요동군 속현 총 18현 중에서 요하 이동에 실재했던 현은 양평을 비롯한 동부도위 속현등 6-7개현이고, 나머지는 요하 이서에서 의무려산까지 분포되어 있었음.
발해 연안 지역은 원래 임둔군이었다가 낙랑군 요동반도 지역과 함께 공손씨가 대방군으로 함.
대(帶)방(方)은 '띠모양으로 엮은 방주(方舟)'를 의미하는 군으로 발해 연안을 끼고 요동반도 서부지역까지 허리띠 모양으로 길게 늘어진 황폐된 해안 지역을 산동지역에 영주(營州)를 설치하며, 해로 상의 교통을 염두에 두고 공손씨가 만든 것임.
연북장성의 유지가 부신(阜信)시 동쪽(유하 이동)으로는 발견되지 않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산해경 해내동경은 요수(潦水)를 등재하였으나, 후인들은 이를 요수(遼水)라고 강변한다.
심지어는 수경 대요수편에 하북성의 요수의 발원지인 위고산(衛皐山)을 동북요동지역의 요하 발원지(衛白平山)로 등장시킨다.
고(皐)를 세로로 적으면 백평(白平)과 유사한 자(字)로 된다.
고의인지 오사(誤寫)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북성의 하수(河水)를 요동지역의 하수로 조작한 것임은 이점을 보더라도 확실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박식한 중국의 학자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언급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암묵적인 동의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의 산수를 기록한 산해경에 요하가 빠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즉, 하북지역의 요수(潦水)를 동북지역의 요수(遼水)로 우기지 않으면, 사기 흉노열전이 말하는 연북장성의 요하 이동(양평)까지 축조라는 기사는 믿음을 잃게 된다.
중국 내에서 3대(大), 혹 7대, 또는 10대 라는 요하가 산해경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서가 연나라의 영토의 동쪽 경계를 만번한이라고 함으로써 흉노열전이 전하는 양평설을 사실상 반박함.
왜냐하면 만번한은 지금의 세하(細河)를 이루는 자연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요하 이동의 양평과는 400리 정도 서쪽에 있는 것이 된다.
안시성 전투로 유명한 건안성(안시성의 남쪽)을 국내외 학자들은 요동반도의 개주(蓋州) 부근지역으로 비정하지만 건안성은 옛 평곽으로 요하 서안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지금의 유하(柳河) 동쪽, 수수하(秀水河)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평곽성이 그 유명한 모용씨 형제의 분쟁에서 모용 仁이 평주자사를 자처하며 거하던 곳이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에서 모용씨 형제의 분쟁 중에 등장하는 문(汶, 즉 만)현을 평곽 서쪽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지금의 망우하 동쪽에 험독이 있었고 세하를 잇는 선상에 만(문)번한 현이 있고 유하 동쪽에 안시와 건안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요동군 속현들이 모두 남쪽 해안가로 비정됨에 따라 요택도 남쪽에 비정되고 있지만, 사실상 당태종이 오고 갔던 요택은 세하와 유하 사이에 있었다.
이곳이 옛 연나라 태자 丹이 숨은 衍水(중국 학자들은 태자하로 비정하지만)이다.
한서 지리지는 소제(昭帝) 시에 전국(全國)의 무리를 모아 새로 요하 이동에 축조한 현토 요동성이 반영된 것으로 양평성은 이때 축조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사기 흉노열전을 조작, 또는 참입하였는가?
가장 의혹이 가는 인물은 반고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사로이 '개작국사'(改作國史)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후한서 반고전).
주지하듯이 반고 부자(父子)는 사기를 연구하고 미완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해 왔다.
그리고 반고 시대(후한)에 사기는 많은 부분이 미완성, 또는 분실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사로이 국사를 고치고자 한 것은 사기를 말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발빠른 동생의 대처로 그 조작의 사정을 조정에 고하고 옥에서 풀려난 반고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한서를 집필하게 되는 것이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원래의 현토군(치소 옥저, 즉 부조)은 사라지고 고구려현을 치소로 하는 현토군만이 등재되어 있다.
삼국지가 옥저가 원래 현토의 치소였음을 밝히지 않았다면 소제 때의 현토군의 이동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요동군 역시 마찬가지 였다.
관련하여 평양 부조예군묘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의 편년을 기원전 1세기 경으로 편년한다.
부조(즉 옥저)가 현후(縣侯)로 되는 것은 광무제 건무6년(기원 후 30년)에 변군의 도위를 파한 후의 일이다.
대체로 대조대왕 4년(56년) 옥저의 정벌로 그 지역의 현후였던 예군이 평양지역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그 무덤에서 발견된 동검을 기원전 1세기로 편년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 시킬 때의 요동군은 지금의 하북성 탁군지역에 있었다.
왜냐하면 폐지된 창해군 지역에 요동군 동부도위가 설치되고(추정), 섭하가 그 직에 임명되기 때문이다.
대릉하(열수, 사마천의 패수) 상류를 건너와 섭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당시 고조선이 열양(즉 열수의 북쪽, 패양)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해경은 열양이 연나라(한 제후국 연왕 노관)에 속한다고 하고 조선열전은 위만이 보새(保塞)-외신(外臣)하였다고 하였지만, 염철론이 기록하듯이 문번한(沛水, 즉 세하) 지역의 요(徼)를 넘어 연나라의 동쪽지역을 탈취한 것이었다.
사마천은 한흥이래제후왕 연표에서 노관의 연나라 영역의 동단을 요양(遼陽)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열양의 열을 유사음 요로 살짝 바꿔치기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열전에 열수는 등장하지 않는다(열구는 제외).
대신에 패수(浿水)가 등장한다.
혹 패수(浿水)와 패수(沛水)를 동일 시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조선열전에 등장하는 패수서군(=패수상군)은 대릉하의 북쪽(혹은 서쪽)에 위치했던 고조선 군사이다.
옛날에 대릉하 북쪽의 유성으로 나가는 길은 2갈래, 즉 동도와 서도가 있었다(자세한 것은 생략).
그 서도(西道)가 노룡샐새를 빠져나가 북쪽의 백랑산으로 통하는 길이고, 동로는 옛 영지새(후의 임유관)를 나가 동쪽의 청산(靑山)으로 나가는 길이다.
위만이나 섭하가 새(塞)를 나가 건너는 패수는 동로인 영지새를 나가 동쪽의 청산으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대릉하를 건너 패수서군이 있었던 지역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육로군은 요동을 출발하여 옛 노룡새(희봉구)를 나가 북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서 만나게 되는 것이 패수서군, 즉 대릉하 북쪽에 있던 고조선의 병사이다.
이 서로로 향하는 육로군은 결코 패수를 건너지 않고 왕험성(험독;응소의 설이 옳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고조선(패수서군)과 서쪽에서 접하고 있던 흉노 좌현왕 세력이 새밖으로 축출된 직후여서, 노룡새로 통하는 길(서로)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