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토쿠 천황은 제15대 오진 천황[應神天皇]의 네 번째 황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나카츠히메노미코토[仲姬命]이다.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를 황후로 맞이하여 네 명의 황자를 두었으며 황후가 죽은 뒤 맞이한 야타노히메미코(知田皇女) 황후와 3명의 비(妃)에게서 1남 1녀를 더 얻어 총 5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 황후에게서 태어난 황자 중 세 명은 후에 각각 제17대 천황인 리추천황[履中天皇], 제18대 천황인 한제이 천황[反正天皇], 제19대 천황인 인교 천황[允恭天皇]으로 즉위하였다.
닌토쿠 천황릉 항공촬영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닌토쿠 천황이 재위 중에 가와치 평야(河內], 현재 오사카 동부 지역)에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堤防)을 건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 공사이다. 또한 황실이 직접 관할하는 토지인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이후에도 오사카 지역에 제방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전형적인 백제식 오방체제라고 생각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일본을 통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에 비추어 봤을 때 《니혼쇼키》의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어, 정확한 재위 년도는 알 수 없다.(두산백과 참조)
사실, 닌토쿠 아니 인덕천황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냥 그 능이 관심이 있을 뿐 이다. 전방후원능이라는 그 능이 영산강과 관련이 있어서도 아니다. 사실은 그 규모 때문이다. 거대하 해자....해자만도 3개에 걸친 그 규모, 일본을 무시할 수 없겠다고....내가 알던 왜가 아니라고 속으로 그 무덤을 보며 되내었다. 사실 그 무덤은 대학생 시절 정말 충격이었다.
3중의 해자
피라미드 안부러운 저 무덤..... 한국의 경주 대능원을 훨씬 능가하는 그 무덤을 보며, 솔직히 웅크러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릉을 건설하려면, 하루 2000명 장정들이 15년 8개월간이나 동원되고 이들이 져 날랐던 돌과 흙만도 5톤 트럭으로 56만2300대 분량인 것으로 나왔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어머어마한 대규모 공사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인 닌토쿠 왕은 고대 시대에 그 정도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며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끌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에서 실질적 왕권이 시작된 시점을 닌토쿠 왕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로 야마토 시대(고분시대)를 이끈 시대를 ‘나니와 대세(難波 大勢)’라고 명명하며 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바로 닌토쿠 왕이라고 밝혔다. 능의 옆에는 인덕천황의 재현된 궁전모형은 가로 42m, 세로 21m의 대극전(大極殿)에 서 있었는데, 입은 의상들이 백제나 신라 귀족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했었다. 그럼에도 솔직히 눌리는 기분을 이기질 못했었다.
* 백제인을 등용한 인덕천황
그후, 인덕천황릉을 조사하면서, 닌토쿠 왕이 특별히 백제인들을 아꼈다는 것을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백제인 신하가 죽었을 때에는 매우 슬퍼하며 따로 신사를 지어주었을 정도였다.
한 예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은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로부터 사냥용 매를 선물 받고 이 매를 백제인 신하 ‘사케노기미(酒君)’에게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는데 그만 신하가 죽고 만다. 왕은 이에 크게 슬퍼하며 따로 장례를 치러주고 그에게 ‘응견신(鷹見神·매를 돌보는 신)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에 의하면, “한일 역사학계에서 인덕천황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고대 국가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과 매우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기 때문”이며 “백제도래인들이 대거 살던 오사카를 수도로 삼을 정도로 왕실 차원에서 한반도와 의 교류의 문을 활짝 열었던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몇년이 한참지나고, 닌토쿠 천황의 유물(보스턴 박물관 소장)의 사진을 보며, 백제 왕실과 닌토쿠 황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능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너무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제야 난감한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백제나 고대 왜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 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 내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 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칼, 거울, 방울은 신성과 왕권의 상징이다)
환두대도
닌토쿠 왕은 오사카의 건설과정에도 백제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개인적으로는 인덕 자신이 백제인이라고 생각을 한다)
닌토쿠천황
닌토쿠 천황은 홍수를 막기 위해 오사카의 물줄기를 바꾸는 제방공사를 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며 “당시 공사 때 백제인들이 기술자나 공사 감독관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요새는 닌토쿠 천황 당시 오사카 거주 인구의 3분의1이 백제인이었다고 한다.
결국 닌토쿠 천황릉을 건설한 것은 백제인임에 틀림이 없다.
즉, 백제의 기술과 왜의 노동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원래의 천황 릉역도
일제는 역사 과장 조작의 바탕으로써 일본의 건국 시기를 600년 올려 ‘기원 2600년 만세일계의 천황’설을 내세우고 신토주의 황국사상을 외쳤다. 급기야 1910년에는 한반도 침략과 함께 서슴없이 백제와 관계된 지명들을 없앴다. 백제인 신주(神主) 주군의 정체를 숨기고 다카아이신사라는 본래의 사당 이름마저 현재처럼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사’라고 개칭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실상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와 근접된 규슈 섬을 완전히 정복한 백제인들의 제2 진출지는 다름 아닌 본토(혼슈)의 오사카 땅이었다. 백제인들은 기타큐슈로부터 대형 선박들을 띄워서 일본 열도의 본토 세도나이카이로 동진(東進)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백제인들이 상륙한 곳이 지금의 오사카 항구 지역인 난바 나루터였다. 이 나루터 일대를 교두보로 해서 오사카는 백제인들의 새로운 식민지 구다라스가 되었다. 더구나 그 나니와쓰 땅 중심지에 가장 큰 행정구역의 정식 명칭을 ‘구다라 고리’로 불러온 사실 또한 우리는 새롭게 평가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닌토쿠왕은 도대체 누구일까? 두 번째로 큰 무덤인 오진왕릉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의견은 오진왕이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둘째아들인 곤지(그는 백제의 좌현왕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곤지는 개로왕의 아우로도 등장한다. 개로왕이 곤지에게 왜로 건너갈 것을 명했다. 곤지는 왜로 건너와서 터전을 닦고,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때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박사가 건너왔다. 미지의 세계에 문명을 수혈하기 시작한 것이다.
곤지는 왜로 와서 아들을 다섯 낳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나중에 백제의 동성왕이 된다. 그리고 넷째 아들이 닌토쿠왕이 된다는 것이다.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문주왕자는 웅진으로 가서 백제국을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곤지는 백제로 건너가 형인 문주를 돕는다.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곤지가 백제로 건너와 병관좌평을 맡아 일하다가 피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여간 일본에서 곤지는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신사가 아직도 존재하고, 신으로 섬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오진왕릉은 곤지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나, 무덤의 형식이 백제와 많이 다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묘제는 가장 보수적인 유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장품을 통해, 백제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알아냈으면서도, 묘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를 안고 있다. 서울지역에서(하남쪽) 최근 전방후원능의 원형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 묘제만 풀리면, 완전한 퍼즐이 맞추어 질 것 같은데, 아직은 안타깝다. 그리고 솔직히 여전히 한성위례성의 위치조차 찾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더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