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02 15:38
[한국사] 당의 백제정벌의 이유1 (윤충의 월주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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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또 다른 종족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며 북쪽에 고구려가 있고 그 나라 왕이 있는 곳에 동서의 두 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며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잡지) 6 중 또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9세기 말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의 태사시중(太師時中)에게 올리는 글 중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 (회수 이남과 양자강 하구)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 (요서 지역, 현재의 북경 지역, 산동반도)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 <삼국사기>, 제46권 열전(列傳) 6 중
위 기사는 백제의 월주 (현 저장성이다. 성도는 항저우[杭州]이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회계에 속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양주에 속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오나라에 속하였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동서로 나뉘어 절동과 절서의 양도가 설치되었다)를 지배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구당서의 기록이다.
물론 강단에서는 요서백제와 함께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내용 중 하나이다. 다만, 백제의 영토개념은 중국과는 달랐다는 점은 명확히 알야햐 한다. 백제’의 생존양식, 즉 활동방식은 다음과 같다 즉 그 세력의 활동이
(1)‘점’(포,항,도시 중심), (2)‘선’(교통과 네트워크), (3)‘면’(영토와 통치)에 있어 점과 선을 더 중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중국과 근대국가들이 면 중심의 세력활동을 영위한데 반해, 백제는 세력 구축에 있어 굳이 ‘면’을 장악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국적’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특히 중국의 영토 내에서 세력을 가진 해양세력들(백제인+백제에 협력하는 제 세력)이, 백제왕(동성왕)의 주선 하에 한반도 서해안은 물론 중국 동해안과 내륙의 핵심 지역이름을 가진 관작을 받는 행동에 대해 이러한 면,선 중심의 영토관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백제의 역사를 파악할 수 없다.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개로왕의 죽음에도 백제가 10년 만에 북위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이 된다. 즉, 한성위례성 지역(현재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음)이라는 면을 잃었기에, 백제의 세력이 크게 약화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단의 생각이지만, 사실 백제는 면 외에도, 다양한 지역(중국과 왜)에서 점과 선을 보유하고 이 점과 선을 중심으로 한, 백제세력은 전혀 고구려의 침략에 상처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백제의 세력근거는 해상 무역과 외교 통로 보호이다. 백제의 경제력은 면에서 나오는, 농업생산력이 아니라,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 왜로 이어지는 중개무역과 운송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또 해상 교역로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력이 필수적인데 ‘백제’는 그 세력이 강대해 졌을 때에는, 점 과 선 을 보호하는 해군력뿐만 아니라 ‘면’을 지배하기 위한 육군을 증강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특히 중국 대륙이 정리되고, 만주와 한반도, 왜에서 다양한 세력이 대치했던 5~6세기에는 ‘면’을 장악할 필요성이 오히려 더 절실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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