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고종은 민씨가 죽고 난뒤 비로소 개혁다운 개혁인 광무개혁을 시작했어요.
그 전엔 일본,청나라에 붙어서 나라 잇권이나 팔아먹었죠.
각설하고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건
민씨의 공작 덕분이었으니 고종의 친정 초반부터 정국은 민씨가 주도했을 겁니다.
그러니 민씨 척족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함은 물론 매관 매직으로 온 나라를 부정부패하게 만들 수 있었겠죠.
고종의 주위가 민씨 척족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어떻게 정국을 주도합니까
고종은 민씨가 살아있었을 동안에는 민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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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에겐
고종이 치세 초반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후반은 명성황후에게 가려져 있는 유약한 왕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고종은 민씨의 꼭두각시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민씨를 얼굴마담 세운 것도 고종 본인입니다.
고종과 민씨는 공동 정치 파트너 입니다.
조선의 국법에, 왕을 놔두고 왕비가 설치는 경우는 전무합니다.
왕이 미성년자일 경우, 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경우가
유일하게 여자가 남자보다 더 실권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수렴청정 이란 것도,
정해진 날짜에, 딱 정해진 몇 시간동안
왕 대신 대비가 정무를 보는 것이지..
또한, 신하가 상소를 보고할때에도
어린 왕에게 먼저 정식으로 보고를 쭉- 하고
그 후에 수렴을 하는 대비한테 보고를 하지..
국왕을 앞에두고, 왕이 어리다고,
대비한테 바로 보고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렴청정도 이러한 마당에..
조선이란 나라에서,
민씨가 왕인 남편을 두고, 자기가 앞에 나와 설친다? 있을수 없는 일임.
민씨네는 고종의 외가입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었던건 맞습니다.
그래서, 민씨네가 설친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지만..
고종을 무시하고, 명성황후가 설친적은 없습니다.
또한,위세떨던 민씨네의 권력도, 실상은 고종이 허락한 것입니다.
광무개혁은 왕비가 죽어서, 비로소 고종이 실권을 가진게 아니라..
당시,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간섭하던 청나라가 패배한게 주요 이유이고,,
청나라가 버로우 탄 사이에, 일본을 끌어들인 개화파 관료들의 영향이죠.
그리고 그때쯤엔
고종도 개화 노선만이 시대적 과제이자 대세라는걸 인정할 때이기도 하고요..
물론, 끝까지 전제왕권을 포기하지 못한건 그의 한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