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마한사회는 B.C.4세기를 전후하여 초기 철기문화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 노령 이남지역의 중심지는 영암과 화순 및 함평 등 영산강의 지류에 자리하였다. 마한의 중심지는 철기문화의 확산에 따라 대외교섭이 늘어나고, 연안항로가 활성화 되면서 서남해 연안지역으로 옮겨졌다. 해남반도는 한중일을 연결하는 고대 연안항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해당되며, 백포만에 자리한 군곡리는 기항지 구실을 하면서 대외교류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삼한사회는 2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낙랑군이 약화되면서 목지국 진왕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伯濟國과 安邪國 및 拘邪國 등이 대두하였다. 서남해지역의 경우 해남 백포만에 자리한 臣雲新國이 두각을 보이게 되었다. 신운신국의 성장과 발전 배경은 해양활동의 증가와 한랭화에 따른 기후 변화를 들 수 있다. 서남해지역은 취락구조와 주거지 및 무덤의 축조 방식 등을 통해 볼 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룬 사실이 확인된다.
서남해지역은 3세기 후반에 이르면 西晉과의 대외교섭 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드러낸다. 新彌國의 사절은 서남해지역과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20여 소국의 대표단을 이끌고 대방과 낙랑을 경유하여 요령성 遼陽市에 위치한 東夷校尉府를 방문하였다. 신미국은 서남해지역과 영산강 유역에 분포한 마한 소국들의 대외교섭을 주도하는 등 연맹체사회 형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신미국은 4세기를 전후하여 西晉의 멸망, 東夷校尉府의 붕괴, 낙랑과 대방 축출 등 국제환경이 변화되면서 연맹체사회 형성에 필요한 외적인 동력을 상실하였다. 군현이 축출된 이후 서남해지역 해상활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집단은 침彌多禮였다. 침미다례는 신운신국과 신미국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신운신국은 해상활동을 통해 서남해지역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했고, 신미국은 서남해지역 및 영산강 유역에 분포한 마한 소국들의 대외교섭을 주도하였다.
침미다례는 백제의 남진 압박에 맞서면서 노령 이남지역 마한사회를 통합하여 연맹체를 형성하였으며, 전북 서남부지역 일대까지 영향력 하에 두었다. 침미다례는 백제의 남진 압박이 가속화되자 옥녀봉토성과 일평리성을 축조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침미다례는 백제에 남진 경략에 맞서 옥녀봉토성을 버리고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의 현산고성 등에 올라 최후 항전을 벌였다.
백제의 마한 경략은 강진의 古奚津을 거쳐 침미다례를 도륙한 후 전북 서남부지역의 比利ㆍ피中 등을 복속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백제는 침미다례를 비롯한 서남해지역을 장악한 후 토착 해상세력을 내세워 가야 및 왜국으로 연결되는 해상교역로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5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리게 되면서 서남해지역 지배는 어렵게 되었다. 침미다례가 약화된 후 해남 북일 방면의 해상세력이 두각을 나타냈고, 영산강 유역은 영암 시종집단을 거쳐 나주 반남집단이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