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뜬금없다 여기시겠습니다만
저도 최근 '낙랑'과 '평양'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이 생겨 검색을 좀 하다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이래저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나라이지만 아직도 재야의 고수 분들이 계시네요.
역시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감방친구'님의 놀라운 고찰들을 보고 정말 많이 배워갑니다.
이어지는 저의 질문에 고견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한사군과 낙랑 문제와 관련하여
정말 기초적인 자료임에도 턱없이 간과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기록입니다.
출처는 국편위.
十五年......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유명한 호동왕자 설화에 이어
'북국신왕'이 '낙랑'을 멸했는데
7년 후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군대를 파견해 '낙랑'을 공격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삼습니다.
이로 인해 '살수 이남'이 한에 속했다고 했습니다.
'다시'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다시'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낙랑'은,
후한 광무제 대에 처음으로 한나라 영역이 된 겁니다.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한 최리의 낙랑과 광무제가 군현을 삼은 낙랑을
굳이 별개로 봐야만 하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맥락상 동일한 존재로 봐야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본래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최리'라는 인물이 다스리던 낙랑왕국이 있었고
고구려의 침략으로 멸망당했는데
7년 후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그 땅을 점령하고 군현으로 삼음으로 인해
'살수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속했다는 겁니다.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후한서의 동일 연도(ad 44) 기사에는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來附
라고 했다는데,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조 기사와 맥이 닿는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바다를 건널 정도의 대대적 군사행동이 정작 중국측 기록엔 왜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낙랑'을 습취해 군현을 삼은 직후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후한서에 생략된, '東夷韓國人'이 뜬금없이 '낙랑'에 '내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삼국사기에 설명되어 있는 것이죠.
'살수'가 어느 강이냐 하는 지리고증 문제가 남습니다만
만약 강단 주류의 통설대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면 아주 간단하게 아귀가 맞아들어갑니다.
고고학적으로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군'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왕국의 땅을 후한 광무제가 탈취하여 설치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던 낙랑군은,
위만조선이나 그 이전의 고조선 중심지와는 하등의 연관 관계가 없게 됩니다.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4군'중 하나인 낙랑군과는 아예 별개가 되는 것이죠.
'살수'가 청천강이 아닌 다른 강이라고 해도,
더 남쪽의 강이 아닌 다음에야, 더 북쪽의 강이라면 맥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듯 합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평양 일대에서 나오는 '낙랑'유물들의 정체와
문헌상 위만조선의 중심지 및 강역과 고고학적 '평양 낙랑군'의 불일치 문제가 간단하게 설명됩니다.
애초에,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고고학적 '평양 낙랑군'은
위만조선 강역에 설치된 '4군'중 하나인 '낙랑군'과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였던 겁니다.
소위 한사군 위치 논란은
단지 '낙랑'이란 명칭 때문에 오랜 세월 이어진 혼동의 아사리판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또한 이후 시대의 문제들,
'평양'이나 '漢城'등의 위치 및 정체 문제
백제의 기원과 중심지, 백제왕의 작위명(낙랑태수) 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선 다 쓸 수 없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설명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세기의 논쟁'에 대한 답이 거의 허무개그 수준이라
짧은 지식과 허접한 이해력으로 헛짚은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 켠에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경우 제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문제나 모순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