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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9 21:56
[한국사] 토문은 두만도 되고, 송화강 상류 지류도 됩니다.
 글쓴이 : 하응하치
조회 : 1,405  

토문은 위대한 만족들이 사용하는 만주어 보통명사인 투먼을 음차한겁니다. 두만강도 토문으로, 송화강 상류 지류인 오도백하도 토문으로 불렸습니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은 명백히 두만강입니다.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에 오르기전 혜산진에서 이선부, 박권과 회동할때 차관접대사의별단에 토문은 두만이라고 적혀있었고, 곧 오라총관 목극등이 자신들의 일행과 조선인 군관을 데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죠. 그러나 목극등의 착오로 실제위치는 두만강이 아니라 오도백하였죠.

 다음은 이를 증명해주는 숙종 38년 5월 23일자 기록입니다.

총관(摠管: 목극등)이 백산(白山: 백두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생략)

 몇달 뒤인 12월 7일, 홍치중이라는 인물이 국경을 잘못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조정에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때 함경 감사 이선부가 백두산에 푯말 세우는 역사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겸문학 홍치중이 일찍이 북평사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이 북관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중략)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조정에서는 논의가 오고갔긴한데 결국 청에 알리지않았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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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킹 18-02-19 22:06
   
근데 백두산정계비에서 얘기하는 토문강은 두만강이 맞죠
     
하응하치 18-02-19 22:08
   
그렇죠. 1880년대에 조선이 정계비에서 얘기하는 토문강을 오도백하라고 주장하지만 1887년 감계담판에서 이중하가 토문이 두만임을 인정하면서 일단락 되었죠.
근데 1897년부터 다시 대청국에 시비거는건 안비밀;
          
촐라롱콘 18-02-19 22:16
   
1897년부터는 조선도 청국과 대등한 황제국인지라.....^^

또한 청나라의 어려운 사정이....

이후 일어난 의화단의 난과 러시아의 만주진출 가속화로 인해

청국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간도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력을 상실한...

반면에 조선-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좋은 찬스를 맞은 부분도 있었고.....
          
감방친구 18-02-20 11:04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지린·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둔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화.
ㅡ 청국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


해당 지역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

조선인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함.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둔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 ‘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탁본)’을 보냄.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간도가 조선영토임에) 자신을 보임.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하.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함. 김규홍은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임.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
촐라롱콘 18-02-19 22:12
   
님 말씀대로 동위토문의 토문은 현 두만강임에 동의합니다.

서해까지 연결된 압록강과 마찬가지로 현 두만강은 동해까지 이어져

명백한 천연적인 국경선을 형성하지만.....

송화강 지류인 오도백하를 토문이라 주장한다면 만주내륙에서 국경선이 단절되어

당시 조선과 청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송화강지류인 오도백하의 일정지점에서 송화강 본류 또는

만주내륙인 오도백하 일대에서 수 백km 이상 멀리 떨어진 연해주 해역의 동해안까지

또다시 국경선을 정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하응하치 18-02-19 22:21
   
그래서 북간도라는 영역이 명확하지 않지유
     
꼬마러브 18-02-19 23:21
   
감방친구님이 여러차례 논증하셨지만

간도 문제는 그 시원이 조선이 아니라 고려에 있습니다.

고려 때에 혼하 - 동북9성 지역에 진출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후 왕조가 바뀌고 시간을 거치면서 서북 경계가 혼하 - 봉집현 - 봉황성 ... 마지막에는 압록강변까지 축소되었습니다. 동북경계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고요.

이런 식으로 축소되는 영토 인식이 바로 "간도 분쟁"을 야기한 것이지요.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위 사실을 망각하고는

마치 조선 말기에 우리가 명분 없는 땅 욕심을 냈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겁니다.
          
하응하치 18-02-19 23:34
   
조선 말 간도분쟁이 발생했을때 조선 측에서 동북9성의 위치를 명분으로 안내세운 것으로 알고있는데 도데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감방친구 18-02-20 11:18
   
간도문제는
조선시대의 간도문제만을 놓고 보면 이해도 해결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지역은 고려의 영토였으며
다시 공민왕이 수복하였으며
다시 세종대왕이 수복한 지역입니다

조선이 애초에 토문을 두만으로 이해한 거 자체만 중요합니까?
경계비의 토문 글귀와 돌무더기가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가는 물줄기에 표시한 청나라 측의 문제는 안 보입니까?

조선후기에 이 일로 재협상이 벌어졌고 이 재협상은 다시 새 입장에 서게 된 두 나라가 원점에서 다시 국경문제를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것은 보지 않으십니까
                    
하응하치 18-02-20 16:44
   
목극등의 착오도 문제가 있을지언정 조선인 군관 2명을 보내고 같이 오르지않은 함경 감사 이선부와 접반사 박권의 실책도 매우 크다고 보여집니다만.
                    
하응하치 18-02-20 16:55
   
동북9성은 그렇다치고, 제가 말하는건 두만강 이북의 북간도입니다. 국경 분쟁이 없었고, 과거 공민왕이 요심과 함께 편입했던 서간도 일대가 아니고요.
그리고 세종이 간도를 수복했다면 성종은 두만강 이북의 조선 영역을 정벌하려했다가 무산된 것입니까?

그리고 결국 두 차례의 협상 중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토문이 두만임을 인정하고, 논쟁은 두만강 발원지인 홍토수를 국경으로 할 것이냐 조금 더 아래에 위치한 석을수를 국경으로 하느냐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측에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접반사 박권이던 함경 감사 이선부중 한명이라도 목극등 일행과 동행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Korisent 18-02-20 06:39
   
토문강은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죠 두만강은 동해로.
     
하응하치 18-02-20 09:28
   
보통명사에 대해 알아보시길
          
남북통일 18-02-20 14:36
   
그렇게 따지자면 평양, 서울, 강, 나무 모두 보통명사인데요.
보통명사로 나라 간의 국경을 정한다?
억지인 것 같네요.
               
하응하치 18-02-20 16:38
   
?? 풉
감방친구 18-02-20 10:45
   
일단 간도의 크기가 아주 큽니다
압록강 이북부터 시작해서 송화강~흑룡강 이남의 땅이 다 간도예요

애초에 17~20세기 초까지 조선ㆍ대한제국이 인식한 조선령 간도는
봉황성 동쪽 ㅡ 토문강을 따라 송화강 ㅡ 송화강을 따라 흑룡강에 이릅니다

청이 이 지역을 한족 봉금지, 조선과 청의 중립지대로 만들었다가
러시아가 동진, 남하하면서 영토 및 국경 문제가 불거지자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관심을 두면서 조ㆍ청 간의 국경문제가 발생합니다

강희제의 청나라는 이 지역의 지배 근거를 마련하고자 이 지역에 대한
지리정보를 담은 성경지의 국외유출을 금지하고 새롭게 신찬성경지를 만들고 지도를 새롭게 제작하는 등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굳히려는 역사공작, 영토공작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1712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며 주변 지리와 강의 수원과 지류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西爲鴨綠 東爲土門 식의 내용을 담아버렸고 당시 조선관리들은 그 지류에 돌무더기를 쌓아 표시를 하죠

즉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보고 토문이라 적은 것이고 조선은 토문을 토문이라 보고 토문이라 적는 데에 합의한 것이죠

그러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게 19세기에 들어서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지린·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둔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화.
ㅡ 청국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


해당 지역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

조선인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함.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둔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 ‘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탁본)’을 보냄.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간도가 조선영토임에) 자신을 보임.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하.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함. 김규홍은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임.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53&aid=00000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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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이런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은 조선시대까지 함경도 관할 하에 간접영유하던 간도를 적극적으로 행정구역화 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금을 걷습니다.

"대한제국은 광무 연간인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호구 조사를 해 이른바 '신식 호적'을 작성했다."

이 때 조사된 간도지역의 호구 내용은 4~50 대 남성을 가장으로 둔 3인 내외(딸 제외, 아들만 포함)의 가구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1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2369869


관련 기사 2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351006

관련 기사 3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540441


1909년 일본 간도파출소가 한 주민조사에 따르면 간도 지역 한국 이주민의 수는 8만 2999명으로, 중국인 거주자 2만 7371명을 압도했는데 대한제국 정부 역시 신식호구조사 완료 이전부터, 또 일제 간도파출소의 인구조사 이전부터 간도 조선인의 인구수를 10 만여 명으로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실록』 40년 8월 11일).

그런데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상기 내용보다 러시아ㆍ소련과 대한제국 및 북한 사이의 간도 인식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간도 분쟁에 대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지지하며 대한제국과 간도 공동 통치에 대한 특별협약안을 작성합니다(1902년). 이 때는 바로 대한제국이 간도를 정식 행정구역으로 편성. 관리를 파견. 세금을 걷기 시작한 바로 그 때이지요.

물론 이는 러시아의 동방진출 계략과 대한제국의 청나라 견제라는 동상이몽의 이익이 맞물린 것이지요.


관련 기사 1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264253

관련 기사 2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531586

관련기사 3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1&aid=0002220831

아무튼
이 간도지역은 국권피탈 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됩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그 후 연해주로 진출해 항일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합니다.

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일본 패망 후에 간도지역에 조선인들에 의해 간도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ㅡㅡㅡㅡㅡ

1945년 8월20일 간도지역에 일본이 물러가자 간도 조선인이 주축이 돼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를 수립, 국적을 회복하는 등 간도를 관할했다.

간도임시정부의 간도 할양 요구에 5월20일 중공과 소련 대표는 할빈협정(Harbin Treaty)을 체결, 제13조에 '적당한 시기 북한에 편입시킨다'고 규정했다.

1948년 2월에는 북한과 소련, 중국이 2차평양협정을 체결해 간도·안동·길림을 북한에 귀속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들은 1948년 7월부터 간도(間島), 안동(安東), 길림(吉林) 3개 자치구를 직접 행정관할하고, 연길(延吉)·목단강(牧丹江)·무릉(穆陵) 지역에 북한 정규군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공산당 연변위원회가 '간도임시정부'를 접수하면서 간도의 독립과 북한 편입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과 중국은 1962년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체결을 통해 백두산을 양분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확정해 간도를 중국 땅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련 기사
http://www.inews365.com/mobile/article.html?no=477609
ㅡㅡㅡㅡㅡㅡ

즉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조중변계조약이라는 것이 실상은
간도임시정부의 활동과 밀접하며 그 뿌리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 실질 경영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간도 문제는 통일 후에 통일 대한민국의 국력과 의지에 따라 중국의 홍콩ㆍ마카오 수복의 사례와 같이

충분히 우리 쪽에 유리하게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기를 부여했으리라 짐작이 가능합니다
     
감방친구 18-02-20 10:48
   
원게시글 : 간도문제와 간도임시정부, 그리고 조중변계조약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6961&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5

아울러 해당 게시글에서
촐라롱코님과 저의 댓글 대화도 읽어보세요
     
하응하치 18-02-20 16:58
   
하나 묻겠습니다. 언제부터 봉금령이 중립지대로 바뀌었나요? 공도정책도 중립지대라고 볼 여지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참고로 1627년 5월을 기점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신성한 만주에 들어오는 조선인들은 모두 처벌받았습니다. 만주에 대한 봉금령은 한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이고, 팔기는 만주에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만.
          
감방친구 18-02-20 17:04
   
『고종실록』 40년 8월 11일의 발언을 보세요
국경지대라고 하고 있지요?

1627년 5월을 기점으로 그 후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의 일이고요?

그 뒤로 국경문제가 생겨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게 되는 것이고
님의 말 대로 양측의 착오로 정계비 문구와 돌무더기 표시가 국경문제의 재 쟁점이 되었구요

그래서 다시 국경분쟁이 비화된 게 1880 년대구요
그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행보를 보세요
     
하응하치 18-02-20 17:05
   
중한변계선후장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시는건가요? 아니면 모르시는건가요?
          
감방친구 18-02-20 17:12
   
몰랐습니다
저도 찾아 배우는 사람일 뿐입니다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지금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하응하치 18-02-20 17:22
   
대한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견한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그가 조직한 사병조직 사포대의 활동은 1년만인 1904년 중한변계선후장정의 체결로 도문강(두만강)을 잠정적인 국경으로 확정함과 같이 막을 내렸다는 점.

 이후에는 참정대신 박제순이 조선통감부에 오도백하와 해란강 그리고 포이합통하 이남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보호요청을 하자 일제가 간도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여러 난관에 부딪힌 끝에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함으로서 청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점을 보충하고 싶습니다.
                    
감방친구 18-02-20 17:24
   
이 근거로 우리 땅이 아니라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응하치 18-02-20 17:29
   
뭐, 객관을 포기하고 대한제국이 시행했던 법적 근거로 간도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만 북간도의 영역은 송화강 최상류 지류인 오도백하와 해란강 그리고 포이합통하 이남일 뿐입니다. 송화강-흑룡강으로 이어지지않습니다. 당시에도 매우 극소수만 송화강-흑룡강 라인을 국경으로 봤습니다.
          
감방친구 18-02-20 17:15
   
그리고 님한테 또 묻고 싶은 것은
님의 간도문제에 대한 입장은
간도는 조선땅이 아니라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하응하치 18-02-20 17:23
   
예 조선 땅은 결코 아니리고 보입니다.
                    
감방친구 18-02-20 17:26
   
아무튼 님 입장에서나 제 입장에서나 서로 공부하고 연구해 나아가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하응하치 18-02-20 17:29
   
네 답글 감사합니다.
감방친구 18-02-20 11:01
   
토문 문제는 청나라 측의 무지와 경솔에 따른 치명적 실수에 기인합니다

두 당사자의 협정과 조약이 한 측의 무지와 경솔에 따른 치명적 실수로 채결된 잘못된 조약이라면 그 조약은 그 측의 요구에 따라서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채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원점으로 돌아간 재 국경분쟁에서
청은 토문=두만이라며 두만강 이남으로의 퇴거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토문~송화~흑룡강에 이르는 현 길림성ㆍ흑룡강성의 일부를 조선의 땅이라 주장을 합니다

즉 국경분쟁 원점 회귀에서 처음의 양측의 주장이 아니라 새로운 입장이 서로 맞섰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은 간도를 행정적으로 편입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 더욱 공세적이 되어 대한제국 시절에는 호구조사1) 징세2) 치안3) 까지 하며 완전히 우리 영토의 행정구역화를 완료하였습니다

청나라가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마치 조선이 비겁하게 뒤통수를 친 것처럼 해석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 당시 조선은 힘이 셌습니까?

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가고 임오군란이니 청일전쟁이니 러일전쟁이니 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약소국이 또한 조선이요 대한제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는 청에게 당당히 주장하며 맞섰던 것입니다
감방친구 18-02-20 11:02
   
또 간도임시정부에서 조중변계조약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감방친구 18-02-20 11:09
   
간도의 귀속 문제를 다루는 많은 역사대중들이 우리 역사와 이 문제에 대하여 비주체적 해석, 비주체적 견해를 공유하며 마치 그것이 이성적이요 그것이 참이며 그 반대, 즉 간도 귀속의 타당성을 긍정하는 쪽은 마치 국수주의자, 제국주의자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감방친구 18-02-20 11:12
   
청이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조선이 간도를 빼앗았다?
그러면 애초에 그 지역이 조선의 땅이었으나 조선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이 활개를 치며 그 땅을 강유한 것은 잊었습니까?
history2 18-02-20 12:11
   
간도임시정부 등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아무튼 간도를 우리영토화 하려는 노력은 참 대견하지요....그런데, 사실 대한제국 때, 간도의 소유권 주장은 일본의 제국주의의 행태를 보고 따라한 연장선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의화단의 난 때, 고종이 뜬금없이 조선군을 연합군에 끼려한 것도 우습구요. 

좀 더 이른시기 부터, 간도나 대마도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요....
사실, 나하추만 잘 구웠어도,,,요동이 확실히 우리 땅이 되었을 텐데.....역사는 참 아쉬움을 주는 주제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방친구 18-02-20 12:15
   
사실 대한제국 때, 간도의 소유권 주장은 일본의 제국주의의 행태를 보고 따라한 연장선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의화단의 난 때, 고종이 뜬금없이 조선군을 연합군에 끼려한 것도 우습구요. 

ㅡㅡㅡㅡㅡ

이거는 그 앞의 역사와 그 당시 조선의 청에 대한 인식을 간과한 말씀입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잊으셨습니까?

청의 침략으로, 또 청 중심의 세계 질서에 편입됨으로써 우리가 당한 자존성의 상처와 그 굴욕의 역사는 잊으셨습니까?
     
감방친구 18-02-20 12:17
   
의화단의 난 때, 고종이 뜬금없이 조선군을 연합군에 끼려한 것도 우습구요. 

ㅡㅡㅡㅡㅡ

이거를 어떻게 우습다고 표현하실 수 있으세요?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은연 중에 조선을 낮잡아 보는 정서와 태도가 있다는 겁니다
     
감방친구 18-02-20 12:19
   
오히려 청이 기존의 동아시아 세계의 논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서구식 개념의 속국화 하려한 짓거리는 왜 간과하세요?

그냥 당하고 병신처럼 납작 엎드렸어야 조선다운 모습이고 얼씨구나 우리 조상님 잘 하셨네입니까?

제발 비주체적 역사 인식을 타파하십시오
감방친구 18-02-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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