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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9 17:50
[한국사] 3)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718  

러시아 사학자 U.M 푸틴의 고조선 연구


U.M 푸틴이라는 구 소련 학자가 1982년도에 발간한 책 <고조선>에서 남북한.중국.소련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총 망라했다.

단국대 역사학과의 윤내현 교수가 미국의 하버드 도서관에서 이 책<고조선>을 발견하고 책자를 초역.출간이 하였다.

 


U.M 푸틴은 많은 중국사서의 사료와 과거 동아시아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근거로 고조선(古朝鮮)의 영역을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과거 고조선이었던 지역은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의 청동기(靑銅器)는 중국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것으로 주로 현재의 요동지역과 청천강 이북지역에 이러한 유물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과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와 한국 북부(청천강 이북)을 중심지역으로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랴오똥(遼東)이란 지금의 요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하(중국)의 동쪽 변경을 뜻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의 점령 이후 지명이 된 것이다. 또한 그는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고조선의 영역은 한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  이하 생략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고대사 세미나 중 사학자 “U.M 푸틴” 은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

그 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들은 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라고 잘못기록한 내용을 환단고기에서 바르게 밝혀준다. 


삼국유사에는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조선 건국 BCE 2333년에서 44대 단군이었던 구물단군이 대부여로 국호를 개칭한 BCE 425를 빼면 정확히 1908년이 된다. 이것으로 볼때 환단고기 내용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단군조선의 도읍지 이동

 

1) 송화강 아사달시대 (BCE 2333~BCE 1286) 1048년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께서 아사달에 첫 도읍지를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



2) 백악산 아사달시대 (BCE 1285~BCE 426) 8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오른 22대 색불루 단군이 백악산 아사 달로 천도



3) 장당경 시대 (BCE 425~BCE 238) 188년

반란을 일으킨 우화충을 소탕한 구물장군이 모든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의 자리에 오름. 이때 국호를 대부여로 개칭하고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김.

 

고조선사를 한분의 단군사로 잘못기록한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1908세를 살았다라고 한 것은 1)송화강 아사달 (1048년)과 2)백악산 아사달(860년)시대를 합한 것이다.

 

[응제시주],[역대세년가][동사강목] 등에서 단군왕검의 수를 1048년이라 한 것은 송화강 아사달 시대의 역년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최부의 시문집인 [금남집錦南集]도 고조선 역년을 1048년으로 잘못 말하고 있다.

 

1)송화강 아사달시대 1048년과 2)백악산 아사달시대 860년의 기간을 합하면 1,908년이다. 즉 구물장군이 단군에 오르고'대부여'로 국호를 개칭하기 전까지인, 단군조선시대를 통털어 1908년이었던 것이다.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과 삼랑성의 유래를 밝혀주는 환단고기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 성지가 되고 있다. 일찍이 광개토열제도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고구려국본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을 만든 것을 천단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단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재위 51년 무오(단기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






단군왕검과 그 아들의 은덕을 기리는 문화들이 환단고기에 전하고 있다.
 

단군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부루가 첫째요, 부소가 둘째, 부우가 셋째, 부여가 막내이다.『규원사화』를 보면 2세 단군에 즉위했던 첫째아들 부루가 재위 58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만백성이 심히 슬퍼하여 집안에 부루단지(夫婁壇地)를 쌓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루단지(夫婁壇地) 지금은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낱말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모셨던 우리의 오랜 가신(家神)이자, 장독대와 터줏대감의 원형이 바로 부루단지이다.



부루단지의 부루가 누구라는 것도 잊혀졌으나 ‘단지’라는 말은 아직 남아 있다. 부루단지의 단지란 햅쌀을 담아서 부루에게 감사 드렸던 항아리를 경상도에서 가리키는 말이다.『규원사화』에는 또 둘째아들 부소가 불을 피우는 방법을 개발해 부싯돌이란 말이 유래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부소는 신시시대의 고시씨가 발명한 발화법에 따라 마른 쑥에다 쇠와 돌을 쳐서 불을 만들었다.


지금도 불을 붙이는 도구로 쇠와 돌, 그리고 마른 쑥을 쓴다. 이 세 가지 도구에는 반드시 부소라는 이름을 붙여 쇠를 부싯쇠, 돌을 부싯돌, 쑥을 부싯깃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모두 부소씨의 업적을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댕기나, 금줄 등도 단군과 연관이 있다. 댕기라는 말은 단계(壇戒) 또는 단기(壇祈), 즉 단군사당에 가서 빌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또 아이를 낳았을 때나 잡병을 쫓을 때, 신성한 영역을 나타낼 때 사용해 온 금줄은 원래 검줄이 와전된 것으로 검줄은 단군왕검 즉 ‘임검(壬儉)의 줄’이란 뜻이다.







하가점은 고조선 문화 :  환단고기는 하가점 지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2001년 이후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약 10km 떨어진 하가점(夏家店)에서 BC 2,400~1,500년대에 이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어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지는 대규모 분묘터, 제단, 무기 등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 왕국의 성립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토품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 토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상의 발굴성과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확립되거나 강화될 수 있었던 사회기반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학자들은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을 가지고 하가점 하층문화인들의 유형을 추정하였다. 이들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고 하는데(朱泓 길림대 교수), 중화인인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다. 그런데 능하문화(凌河文化 = 비파형동검문화 = 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를 영위했던 문화인들도 ‘고동북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나 부여 등 예맥계 종족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이 문화는 중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의 시작 시점이 기원전 25세기〜20세기라는 의미는 고조선의 개국 시점인 기원전 2333년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지역은 고조선 영역에 포함되는 곳으로 그 문화의 주역은 한민족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BCE 2333년에 건설되었다는 기록에 대해, 그때가 신석기 시대에 속하므로 현실성이 없다는 주류 강단사학계의 주장은 마땅히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고인돌 유적은 환단고기의 사료 가치를 높인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KBS역사스폐셜]고인돌 분포도(북한 평양지역보다 요동지역이 더 정교하고 연대가 빠르다)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의 고인돌도 그 형성연대가 오래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해도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결과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한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 문화를 갖고 있었다. 311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넬슨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 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 (성삼제,고조선 사라진역사 67,70)


 

새라 M 넬슨 교수는 1970년 한국을 방문해 1년간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공부했고, 1973년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산리 유적을 세계 고고학 사전에 올렸고, 1996년엔 세계 동아시아 고고학대회에서 처음으로 한국 고고학을 독립 분과로 만들기도 했다(그 이전에는 한국고고학은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에 속해 있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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