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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8 14:04
[한국사] 고구려의 北燕 망명인의 포섭과 安置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733  


472년 개로왕이 北魏에 보낸 表文에 따르면, “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38) 이는 북위의 군사적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일부 과장된 언사이겠지만, 고구려에서 풍홍 일가가 제거된 이
래 30여 년 이상이 지난 뒤에도 일부 북연 주민들이 여전히 고구려 영토 내에 집단적
으로 거주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39) 이와 관련해서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公의 諱는 元貞이요. 그 선조는 東平憲王의40) 후예로부터 나왔다. 8代祖 軒은 馮
燕에 出仕하여 博士郎中이 되었다. 軒이 죽은 후, 그 子孫은 燕을 따라 요동으로 옮겨
갔다. 조부 婁는 요동에 기탁하여 耨薩이 되었으니 要處의 將軍이었다. 乾封年間
(666~668)에41) (唐이) 동쪽을 평정함에 皇室에 歸附하였다. 父인 順은 北平郡太守
를 追贈받았다.42)
위 기록은 「劉元貞墓誌銘」의 일부인데, 고구려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乾封年間
(666~668) 당시에 唐에 항복한 劉元貞 가문의 선대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묘주
일가의 姓이 劉氏라는 점을 고려하면 漢人으로 볼 수 있는데, 墓誌에서도 後漢 光武
帝의 여덟째아들인 東平憲王 劉蒼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유
원정의 生時에도 확실히 입증하기 어려웠을 과거의 일이며, 그 世系에 대한 정보가
분명하게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의 가문이 漢人임을 드러내는 또다른 단서는 8代祖 劉軒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馮燕’에 出仕하여 博士郎中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馮燕’은 北燕을 말한다.
劉軒은 晉書 기록에 의하면 馮跋의 재위기(409~430)에 太學에서 유학 교육을 담
당했던 官人으로 등장한다.43) 이때 劉軒과 더불어 博士郎中에 임명된 이들이 營丘人 에서의 儒學 교육이라는 博士郎中의 職務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4)
4세기 초 이래 선비 慕容‘燕’ 세력은 귀부해온 漢人士族들 가운데 賢才․能吏를 적극
등용하여 중앙조직 정비와 지방 漢人의 통치 등에 활용하였는데,45) 이들 가운데 일부
는 後燕과 北燕으로 교체되는 요서 지역의 정권 하에서 계속 활동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연의 풍발과 풍홍 정권 하에서 활동했던 주요 官人들의 漢式 姓氏(郭․
王․張․孫․陽․韓․李․高․劉氏)를 통해서도 드러난다.46) 또한 풍홍 정권 말기에 고구려로의
망명을 반대했던 劉訓의 사례를 통해서도 劉軒 이외의 또 다른 劉氏 官人이 활동하였
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풍홍의 고구려 망명 때 劉氏姓의 漢人 출신 인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이 가능하다.
위 묘지명의 기록대로 劉軒이 유원정 가문의 선조가 맞다면, 그의 가문은 과거 北
燕에서 활동했던 漢人 출신 관료였으며, 劉軒이 죽은 후에 그 자손들이 풍홍의 망명
과정에서 함께 고구려로 이주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일족은 조
부 劉婁가 乾封年間(666~668)에 침공해온 唐軍에 항복할 때까지 6대 230여 년을 고
구려에서 활동했던 것이 된다.47) 묘지명의 家系 기록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겠지
만, 5세기 풍홍의 고구려 유입 당시에 여러 漢族 士人들이 고구려로 망명하기도 했으
며, 이후 일정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던 사실이 唐代 지식인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
는 범주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北燕의 망명인 출신인 漢人 일족이 이미 기존의 구심점인 풍홍 일가가 제거된 이후
어떤 계기를 통해 고구려 조정에 출사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고구려에 망명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정치적 지위와 세력 규모가 일정하게 반영
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미 4세기 이래 중국계 망명
인에 대해 官等을 수여한 전례가 있다. 5세기 초에 前秦 혹은 後燕 계통으로 보이는
「덕흥리벽화고분」의 묘주인 □□氏鎭이 고구려에 망명해 온 이후 (國)小大兄을 역임
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鎭의 기존 정치적 지위나 혹은 그가 망명해올 당시에 이끌
고 온 세력 규모를 참작한 결과일 것이다.
또 조금 후대이지만 「대도독한부군지묘지명」(이하 한기 묘지명)을 통해서도 고구려
가 일정 세력을 거느린 중국계 망명인을 官人으로 등용하려 했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48) 이 묘지명에서는 묘주의 부친인 한상(韓詳)이 효창연간(525~527)에 영주
지역이 고구려의 침구를 받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함께 고구려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이후 한상은 영주 지역의 토착 실력자이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집단을 거느렸던
점을 인정받아 고구려로부터 태사(太奢: 대사자)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49)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상이 대사자를 제안받은 것과 관련해서 언급된 ‘항품(恒
品)’이다. 이는 6세기 전반까지 한상처럼 예하에 주민들을 이끌고 온 중국계 인물에게
도 적용되는 관의 수여 기준, 즉 항례(상례)가 있다는 의미로 생각되며, 이러한 관등
수여가 결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50) 그렇다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인사들이 고구려에 들어와 지배층으로 편입된 시기는 4~5세기라는 한정된 시간
적 범위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고구려 이주 계기를 기술한
위 가계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韓詳이 北齊로 돌아갈 당시에 ‘同類’라고 칭해진 중국인 집단 5백여 호를 이
끌고 갔다고 하는데, 이들은 한상의 투항 당시 따라온 주민들로 생각된다.51) 500여
호나 되는 많은 주민들이 10여 년 이상을 韓詳과 연계되어 있다가 돌아갔다는 사실
은, 곧 이들이 한상의 망명 당시부터 귀환할 때까지 계속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436년 당시 풍홍이 이끌고 왔던 화룡성의 주민들도 여러 세력가들의 예하에 귀속
된 집단적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북연에 있던 劉軒의 자손들 역시 유력한 가문
으로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이미 435년 이전부터 풍홍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화룡성 내부에 있던 망명 집단 내부
의 상황과 각 세력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등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개별적인
통제의 가능 여부도 이미 고려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풍홍 집단의 망명을 이끌어 낸 고구려는 풍홍이 領內에 이른 직후부터 그를
臣屬人으로 취급하고, 예하 주민에 대한 자체적인 政事를 제한하였다. 이를 통해 망명
집단의 자율적인 운영과 거주지를 제약하여 일정한 관할 하에 두려했던 것이다. 또한
풍홍의 死後에 고구려는 풍홍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북연의 여러 고위 망명인들을 대
상으로 개별적인 포섭을 진행하여 예하의 주민집단을 흡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에 풍씨 일족의 집권과 북연이라는 정치체의 고수에 연연하지 않는 다수의 망명 세력
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개별적으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북연 망명인 확보와 개별 세력의
포섭은 이미 고구려가 화룡성에서 풍홍 집단을 데려오기 이전부터 어느 정도 준비된 계획 하에 진행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 北燕 출신 유이민의 상층
부가 고구려의 官人으로 진출하는 동시에 그 예하의 주민들이 고구려에 편입되는 양
상은 북연민 집단에만 국한된 특수한 조처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5세기 이래
고구려의 중국계 망명인의 수용과 지배가 장기간의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속되었을 가
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表文에서 고구려가 이전보다 강성해진 원인
으로 풍홍 세력의 유입을 언급한 것도 단순히 과장된 언사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
된다. 이는 고구려가 5세기 중반 이래 북중국 망명인들을 수용하여, 경제적 혹은 군사
적 동력으로써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436년에 고구려군이 화룡성에 진입해 풍홍 망명 세력을 확보한 배경은,
이들을 국가의 일원으로 흡수하여 성장의 한 동력으로 삼았다는 측면에 좀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출처

5세기 중반 高句麗의 北燕 亡命人 수용 배경
안정준(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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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2-18 14:12
   
화룡성이 차오양시라는 주장은 이제 안하는구먼... 일제사학자들이 싫어할듯... ㅋ
history2 18-02-18 15:15
   
좋은글 감사합니다...그런데 북연의 땅은 그냥 '북위' 에게 빼앗긴 건지, 아님 백제나 고구려가 일부라도 차지했는지 궁금해요...용성을 다 불태웠고 그 인민은 고구려로 데려온건 아는데, 그 땅은 고구려는 포기한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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