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사와 동국통감 이후의 기록과 당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인식한 고려 서경은 현 재북한 평양이 맞습니다
2. 이들 사서, 즉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들은
1) 현 재북한 평양이 고려 서경이고
2) 고려 서경이 낙랑군 치소이고
3) 고려 서경이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의 왕험성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1) 현 평양 기자사당은 충숙왕 (1325년) 때에 조성된 것이며
2) 현 평양 기자무덤은 허묘 (가짜무덤)으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3) 신라는 고구려 평양을 영토로 삼은 바가 없으며
4)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지 못 하고 신성ㅡ요동성ㅡ평주ㅡ요서고성 등으로 옮겨 설치했으며
5) 당은 거란&돌궐에 맞서고자 발해 건국을 승인한 후에 다시 발해를 압박하고자 흑수말갈 등을 회유하다가 발해와 전쟁을 치렀으며 발해는 등주를 점령했으며
6) 이후 요동은 발해, 요서는 거란의 차지가 됐으며
7) 신라가 당ㆍ발해 전쟁에 참전하여 다시 공인 받은 것이 패수이남으로, 실제 차지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나
8) 거듭 말하지만 신라는 패수 북쪽의 평양을 차지한 적이 없으며
9) 고려가 요동에 진출한 것은 고려 광종 때의 일이며
10) 고려가 현 평양을 개척한 것은 왕건 때의 일이며
11) 황무지에 궁궐을 짓고, 방어용 성곽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킨 것 또한 고려 전기의 일이며
12) 심지어 이 일이 극심하게 고되어 이 일에 몰두한 정종이 죽자 백성들이 기뻐할 정도였으며
13) 고려는 전기 100여 년에 걸쳐 서경을 개발하였다
4. 또한
1) 현 평양을 고구려 멸망기 평양으로 보기에는 삼국사기, 신당서, 통전 등의 사서 기록에 부합하지 않으며
2) 평양이라는 명칭의 지명은 고구려만 해도 여러곳이었고 심지어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지명에도 등장하며
3) 현 평양을 위만조선 왕검성으로 보기에는 비록 고려사 이후의 우리 사서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요사 지리지는 요양부를 그곳이었다 적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사마천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구성해 본 지리적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5. 또한
1) 한 현도군은 이미 기원전 1세기에 당시 한 요동군 지역으로 축소, 교치됐으며
2) 한 요동ㆍ요서ㆍ낙랑군 등은 후한, 위, 진, 북위, 수 나라를 거치며 만리장성 안쪽으로 교치돼 갔으며
3) 한은 왕망 시절에 이미 만리장성 밖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4) 위ㆍ진 시대에는 이미 호동이교위를 거쳐서 난하 서쪽으로 이들 군현이 대폭 축소, 교치되었으며
6. 또한
1) 삼국사기 근거 낙랑군의 위치는 현 서북한 지역이라 보기 어려운 정황이 서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나타나며
2) 최근 보성리 고분에서 보이듯, 또한 정인성 교수의 장무이묘 연구에서 보이든 낙랑군이 건재했다는 서기 3에기 이전에 서북한 지역에 고구려계 무덤이 출현하며
3) 과거 SBS 스페셜에서 다룬 바에서 보이듯 낙랑군 유물의 조작이 의심되며
4) 최근 문성재 박사가 정리ㆍ발표한 내용에서 보이듯 낙랑군 무덤 태반이 토착계 무덤이고 한계 무덤이라는 벽돌무덤도 실제로는 북방계 무덤양식에 한계 무덤 양식이 차용된 형태이며
5) 기원전 4세기 이후 중국계 유물, 유적이 요심 지역에 출현한다고 하나
6) 한국식 동검이라는 세형동검이 기원전 4~5세기에 한반도 뿐만 아니라 만주, 심지어 하북성 일대에서까지 출토가 되는 것과
7) 중국 춘추시대 뿐만 아니라 특히 전국시대에 수많은 망명자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사실
8) 위만의 무리조차도 망명자였던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9) 중국 망명자들이 조선에 망명한 직후부터 그 전에 쓰던 중국계 물질문화를 깨끗이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돌대가리나 할 짓
7. 또한
ㅡ 3 세기 중심 한반도 실정을 후진 사회, 중국계 정권에 복속된 사회로 묘사하는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서북한 뿐만 아니라 그 시기 경기도 등지에 무수한 조선식 산성, 특히 기원전에 조성되어 기원후까지 수세기 사용된 거대한 토성인 풍납토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 한다
하므로
서로 식민빠니 환빠니 입똥을 싸지르며 시간과 열정을 무용하게 소모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합심으로 애 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