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그럼에도 고이왕님의 글이 있기에 커뮤니티가 발전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사실 한사군 문제처럼 도무지 맥을 못잡겠는 주제도 없는 것 같습니다...분명 중국의 영향을 받은것 같은데,,,,저는 이 지역 주민들이 중국문화에 매료되었고, 상업을 통해 자발적인 문물의 수입은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런 가운데 중국의 강력한 영향이 순간순간 영향을 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400년을 내리 중국이 다스렸고 지방관리를 파견했다는 생각도 수긍이 어렵습니다.
당장 우리나라 고려만 해도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파견되지 않은 곳이 더 많았습니다. 하물며, 한나라 시대는 더 오래전이고 영토도 광대하죠.
애당초 고조선이 한에 멸망당하는 것만 봐도, 내부의 투항에 따른 것입니다. 당연히 한이 변방 고조선지역을 직접 통치했을리가 없죠. 관리들을 파견하기도 하겠지만, 거의 토착세력에게 관작을 주면서 간접통치했을 겁니다. 당연히 토착세력들 입장에서는 한의 권위를 이용하는게 당연하겠고요.
기존의 봉건제가 수도 인근을 제외한 지방을 친족 및 공신에게 분봉(分封)하여 통치하도록 하고 그 통치권을 세습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분봉된 통치자들을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웠던 것과 달리 군현제는 세습을 금지하고 행정관의 임기를 정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지방을 모두 중앙 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었다. - 위 링크 글 내용 中
낙랑이란 명칭은 '기자가 낙랑조선으로 갔다' 라는 구절에서 나옵니다.
낙랑이라고 적힌 유물을 모두 한나라와 연관 지을수 없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기자는 상(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뀔때 사람이고,(상나라왕족)
한나라는 훨씬 이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낙랑=한사군 이런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죠.
정동대장군 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로 삼고 전과 같이 낙랑공왕(樂浪公王)을 봉하였다.
-고국원왕
낙랑태수(樂浪太守)”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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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
송분-충숙왕 고려 후기의 행신
왕영-고려 전기의 왕족
복진-여주(廬州) 사람으로 원말명초의 무장
김경용-고려 중기 문신
공손연-위나라 요동 양평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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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태수
왕준- 서진, 전연의 인물로 낙랑군 사람이다
왕조-낙랑지역의 토착 호족/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
모유-백제 동성왕 때의 장군/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
유헌-왕조에게 살해당한 전임 낙랑태수
유무-위나라 관구검과 같이 출진한 낙랑태수
선우사-후한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낙랑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