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은연 중에 계속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ㅡ라고 생각하였네요
낙랑군은 요서에 있었는데 말이죠
이게 요동ㆍ현도ㆍ낙랑의 한 군현의 소재지를 일괄 고찰 정리하지 않은 탓입니다
백제 초기의 낙랑은 서북한의 낙랑국이 맞고
246년 고이왕 대에 245 년 만에 등장하는 것은 낙랑군이 맞네요
이렇게 정정합니다
그리고 백제는 그 건국 최초기에 요동 남부, 경기 북부에 해당하는 두 거점의 이원 체제였다는 추정은 계속 고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서기 44년 살수 이남 낙랑의 한나라 재귀속 문제는
꼬마러브님의 견해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는
1) 살수 이남이 다시 한나라 땅이 됐다는 고구려 본기 44년 기록에서 이 '다시'라는 부사어
ㅡ 그렇다면 37 년 이전에는 이곳이 한나라 땅이었다는 뜻인가?
2) 패수는 두 곳인가?
ㅡ 백제는 그 건국 초부터 패수를 경계로 고구려와 맞대고 있었는데 이 때는 낙랑국이 존재하고 있을 때이다
ㅡ 백제 초기의 낙랑은 백제 동쪽에 있었다
ㅡ 패수를 대동강에 한정한다면 설명이 안 된다
ㅡ 즉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로서의 패수는 요동의 패수라 봐야 타당하다
ㅡ 가뭄이 들어서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 가호 1,000여 호가 고구려로 대량 이주한다
ㅡ 이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백제를 괴롭히던 낙랑국이 가만히 두고 봤겠는가
ㅡ 물론 서북한에도 패수라는 이름의 강이 있었다고 동시에 상정해야 한다
3) 살수는 두 곳인가?
ㅡ 고구려 남쪽 국경으로서의 살수, 낙랑국의 북쪽 경계로서의 살수, 살수이남이 다시 한나라 차지가 됐다는 44년 기록의 살수는 서북한에 비정할 수밖에 없고 살수의 이름을 지니고 있던 청천강으로 볼 수밖에 없다
ㅡ 그러나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살수, 강감찬 귀주대첩의 다하ㆍ타하로서의 살수는 압록강 위치 고찰과 맞물려 요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