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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07 08:59
[한국사] 백제사의 미스테리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738  

백제는 이원체제의 국가로서 이 두 체제의 역사가 한 데
 합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되면서 혼란을 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최초 1)고구려와 말갈의 남쪽, 낙랑의 동쪽에서 건국하였고 2) 서북한의 마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였으며

1)의 거점은 중국계 국가의 동쪽 영역 축소와 함께 계속하여 서쪽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쉽게 말해서 낙랑군이 서쪽으로 옮겨 가면서 백제의 1) 거점 역시 따라 움직이며 계속하여 낙랑군의 서쪽, 혹은
서남쪽에 위치합니다

요동 --> 요서 --> 하북 --> 발해 동안 --> 산동

그리하여 마침내 5세기 북위와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이고

백제의 이러한 거점은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의 본진)를 멸망시키게 된 이유, 후에 신라방이 실제로는 백제인들의 거점이었다는 추정으로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대방태수가 아니라 대방왕인 이유는 위나라가 고구려와의 협공으로 공손씨를 제거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이것을 진나라가 이어 받는데 평주에 예속케 한 후에 군국으로 만듭니다 즉 일정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러니 대방군은 군이면서 국이 되는 것이죠

백제사에서 낙랑이 200여 년(bc 1 ~ ad 246) 간 증발한 것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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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2-07 09:02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8년(기원전 1)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책계왕 1년 (서기 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책계왕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고구려

동천왕
12년(서기 238), 위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쳤다. 임금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천 명을 이끌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二年 魏太尉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천왕
12년(서기 259) 겨울 12월, 임금이 두눌(杜訥)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 고려 인종)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서천왕, 봉상왕
양맥과 숙신의 난 평정
모용선비의 침입 격퇴
감방친구 18-02-07 09:03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5224&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6

3세기 이후 고구려와 요동의 상황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478&sca=&sfl=mb_id%2C1&stx=cellmate&page=5

요서ㆍ요동ㆍ낙랑군의 인구 변화 (한 ~ 수)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758&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0

3세기 낙랑군의 교치상(태강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695&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0

서안평의 위치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35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4%9C%EC%95%88%ED%8F%89&sop=or&page=2

양맥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80414&cid=46620&categoryId=46620
감방친구 18-02-07 09:17
   
중국은 후한 이후로 지금의 요서ㆍ요동을 실질 통치, 실제 지배하지 못 했습니다

공손씨가 200 여 년, 모용선비가 200여 년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작위를 제수하는 것으로 간접 통치를 하였을 뿐입니다

모용선비는 200여 년 가운데에 뒤의 100여 년은 전연, 후연, 북연 등의 나라를 세우기도 합니다

후연은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 작위를 주며 이 지역에 대한 실질 지배를 인정하기도 하였고

장수왕을 시작으로 고구려 태왕들은 영주, 평주목의 작위를 중국의 여러 나라들에게 부여 받아 세습하였습니다

즉 난하 이동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를 공인하였던 것이죠

백제의 대륙 경영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TimeMaster 18-02-07 10:27
   
백제라는 나라가 하나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봐요.

부여도 북부여와 동부여, 졸본부여등이 따로 존재했듯 백제도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나중에 사서에 기록될때 역사기록이 하나로 뭉뚱거려져 버린게 아닌가 싶다는... 그렇게 생각하면 백제의 여러 역사기록들의 의문점이 해소되기도 하죠.
     
감방친구 18-02-07 10:59
   
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그렇게 봐야 설명이 됩니다
꼬마러브 18-02-07 11:42
   
1)고구려와 말갈의 남쪽, 낙랑의 동쪽에서 건국하였고

- 여기서의 낙랑을 중국의 낙랑군이 아니라 평양 지역에 위치한 독립국 낙랑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온조왕 편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 여기서 "우두산성"의 위치는 지금의 춘천으로 비정되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기신라의 행정구역 명칭만 보더라도 춘천 지역은, 당시에 "우두주" 내지는 "우수주"로 불렸음이 명백합니다. 즉, 두=수 이고... 우수주의 위치는 후기신라의 영역을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한, 춘천 지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내용과도 일치하지요.

牛首州[首一作頭 一云首次若 一云烏根乃]
우수주(牛首州)[수(首)를 두(頭)로 쓰기도 하며 수차약(首次若) 또는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33&categoryId=49615&cid=49615

즉, 당시 낙랑국은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오환선비동이전』'예전' 만 보더라도  樂浪檀弓註 出其地.라고 하여, 예의 특산품이 낙랑단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의 위치를 현 통설대로 강원도로 비정한다면 더욱 더 아귀가 맞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낙랑국은 현재의 강원도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백제를 지금의 경기도 지역으로 비정한다면...

백제 입장에서는 동쪽 강원도 지역에는 낙랑국이, 북쪽에는 말갈이 위치되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감방친구 18-02-07 11:47
   
네, 이건 지난 여름에도 나눴던 얘긴데
낙랑국을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두고서도
동시에 백제와 고구려가 패수를 경계로 국경을 맞댄 게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원체제를 거론하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2-07 16:28
   
낙랑의 문제는 서기 1년 이후 245년 동안 백제사에서 낙랑이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낙랑을 낙랑국으로 보든 낙랑군으로 보든 관계 없이 무려 근 3세기 가량 '낙랑'이라는 이름이 백제사에서 증발해 버린 것

그리고 그 후에 확연히 중국 군현이 분명해 보이는 낙랑군이 등장하는 것이죠

왜 이 245년의 공백이 생기느냐 하는 게 의문이요 관건인 것입니다

즉 이 시기에 백제가 요서에 거점을 마련했다 볼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백제가 줄곧 요동ㆍ 요서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볼 수 없어도 말이죠

반면에
신라의 경우 대무신왕의 낙랑 정벌 이후 신라사에서 낙랑이 완전히 사라지고 맥국이 등장합니다
          
꼬마러브 18-02-07 17:09
   
감방친구님 말씀대로, 삼국사기에서 낙랑이 증발해버린 것은 백제뿐만이 아니라 신라도 포함됩니다.

이는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공격했기 때문에 생기는 공백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요?

"그 후에 확연히 중국 군현이 분명해 보이는 낙랑군" 이라고 함은, 불내현과 화려현이 신라를 공격한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는 중국 사서들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의 낙랑을 '낙랑군'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중국은 사실 '신라'라는 나라의 존재도 잘 몰랐을 겁니다.
               
감방친구 18-02-07 17:13
   
"그 후에 확연히 중국 군현이 분명해 보이는 낙랑군" 이라고 함은, 불내현과 화려현이 신라를 공격한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ㅡ 아니에요

3세기 중후반부터의 기록에서는 아예 관구검이 나오고 하잖아요
                    
감방친구 18-02-07 17:33
   
아래 댓글에 쓴 내용



맥국은 춘천을 중심한 강원도에 있었던 나라로 학계는 보고 있는데
강단 주류학계에서는 대무신왕의 낙랑정벌이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 대한 낙랑군의 지배력을 손상시켜 화려ㆍ불내의 신라 침략과 맥국의 성립 등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신라본기의 화려ㆍ불내가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참고하여 삽입한 기사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2-07 17:15
   
저는 낙랑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제본기 기록 + 고구려본기 기록 + 중국사서의 한군현 축소ㆍ교치상을 고려하여

백제의 이원, 혹은 다원 체제를 가정하는 것이죠
                    
꼬마러브 18-02-07 17:23
   
낙랑국이 기록에서 사라진 245년 간의 기간동안 백제가 대륙에 다른 거점을 마련했을 가능성은 저도 동의합니다
                         
감방친구 18-02-07 17:24
   
그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백제 최초 건국지는 요동남단으로 저는 보는 것이구요
               
감방친구 18-02-07 17:23
   
낙랑이 사라졌다가 고이왕 246 기사에 돌연 등장하잖아요

그것도 낙랑태수로, 백제가 낙랑군을 약탈하고요
이 지점이 백제가 낙랑군 근처에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거죠

책계왕 286 기사는 이 때는 유주 지역의 군들이 군국으로 편성돼 평주에 속해 있던 때이니 대방왕이라 불린 게 맥락이 닿고

책계, 분서왕 때에 한인들과 맥인들이 합세해 백제를 침략하는데 이 시기, 그러니까 3세기 후반 때에 고구려가 양맥의 난을 평정하잖아요 동시에 계속하여 모용씨 세력하의 옛 한 요동군 지역을 공략하고요

즉 고구려의 서쪽 진출과 그 압박이 이들 요동군, 요동군국의 서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백제 분국내지 거점의 침략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2-07 16:28
   
유리 이사금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낙랑과 신라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5191&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7
     
감방친구 18-02-07 16:33
   
맥국은 춘천을 중심한 강원도에 있었던 나라로 학계는 보고 있는데
강단 주류학계에서는 대무신왕의 낙랑정벌이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 대한 낙랑군의 지배력을 손상시켜 화려ㆍ불내의 신라 침략과 맥국의 성립 등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신라본기의 화려ㆍ불내가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참고하여 삽입한 기사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맥국의 본거지인 춘천의 청동기 유적은 어떠한가

하중도 유적의 조성시기

적극적 해석(이건무 박사)
ㅡ 기원전 13세기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소극적 해석(최병현 박사)
ㅡ 기원전 8세기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고구려 석곽묘
ㅡ 6세기

춘천 하중도 (레고랜드 부지) 청동기 유적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922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4%91%EB%8F%84&sop=or
          
도배시러 18-02-07 16:47
   
파사이사금이 실직 의 배반을 평정
실직성, 하슬라, 니하...
신라 북변이 실직성, 실직성 주변을 흐르는 하천이 니하, 발해와 경계가 되는 니하

여기서 맥국은 고구려
               
감방친구 18-02-07 16:50
   
전에 이거 말씀 드렸지만
여기에 니하가 흐르는 것 때문에
강단 주류 사학계에서는 신라가 발해ㆍ당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당으로부터 공인 받은 영역인 니하이남을 이곳으로 보고 발해와 신라의 경계로 비정했습니다

그런데 니하는 또한 패수의 이칭으로 요동에 있는 패수 또한 니하로 불렸습니다
                    
도배시러 18-02-07 16:56
   
고구려, 백제는 요동의 동천리에 위치... 발해는 영주의 동2천리에 위치
발해 남쪽의 니하와 요동의 니하는 위치가 다르다고 봅니다.
                         
감방친구 18-02-07 16:58
   
당연히 다르죠
니하가 기록 상에 두 곳이라는 말이죠
전에 제가 니하 거론해서 도배시러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기억을 못 하시나 보네요
                         
감방친구 18-02-07 17:00
   
도배시러 18-02-07 13:07
   
담로와 백제 본국의 위치는 다를수 있죠
감방친구 18-02-07 17:38
   
그런데 이 가정은 자칫하면
낙랑군이 서북한에 있었다는 통설에 엮일 위험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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