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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06 10:43
[한국사] 고구려 멸망시기 평양의 위치#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337  

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근거

1) 612 년 수나라 육군의 침공 및 패퇴로 본 위치

A
요수 ㅣ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성
(서) ---------------------------------------------------> (동/동남)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동남)
※ 기록에는 수나라 패잔병들이 하루밤낮을 뛰어서 도망쳤다고 돼 있다 근 200km를 하루에 이동하는 게 가능한가?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기록
"가을 7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ㅡ 하루 밤낮을 450리 행군하는 게 말이 되는가?
ㅡ 청천강과 압록강 거리가 450리인가?
ㅡ 수나라 군대가 도망쳐 간 곳은 당시에 수나라 본진이 있던 요동성이다
ㅡ 즉 압록강과 요동성 (심양) 은 가까운 곳으로 봐야 하며 그 강은 혼하 상류, 청하, 태자하밖에는 없다

2) 645, 648 년 당 태종 침공으로 본 위치

C
안시성 ㅣ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서) -----------------------------------> (동/동남)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서) ---------------------------> (동/동남)

E
박작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ㅣ 패수
(북)------------------------------------->(남)


2. 신당서 가탐도리기

1) 육로
A
영주(營州) ~ 연군성(燕郡城)
거리 : 180리
방위 : 동

B
연군성~ 여라수착(汝羅守捉) ~ 요수(遼水) ~ 안동도호부(옛 한나라 양평성, 고구려 요동성, 현 심양 지역)
거리 : 500리
방위 : 동

C
영주 ~ 안동도호부
거리 : 680리
방위 : 동

D
안동도호부 ~ 평양성(平壤城)
거리 : 800리
방위 : 동남

E
안동도호부 ~ 건안성(建安城)
거리 : 300리
방위 : 서

F
안동도호부 ~ 압록강(鴨淥江) 북쪽 박작성(泊汋城)
거리 : 700리
방위 : 남

G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
ㅡ 안동도호부 (고구려 요동성, 현 심양지역) 동북쪽

2) 해로 : 산동 등주에서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이동

H
등주(登州) ~ 대사도(大謝島) ~ 구흠도(龜歆島) ~ 어도(淤島) ~ 오호도(烏湖島)
거리 : 3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I
오호해(烏湖海) ~ 마석산(馬石山)의 동쪽에 있는 도리진(都里鎮) ~ 동쪽 해연에 정박
거리 : 2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J
도리진 ~ 청니포(青泥浦) ~ 도화포(桃花浦) ~ 행화포(杏花浦) ~ 석인왕(石人汪) ~ 탁타만(橐駝灣) ~ 오골강(烏骨江) ~ 남쪽 해연에 정박
거리 : 8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 도화포 : 현 금주 (진저우) 시 서남쪽 호로도시에 있었던 포구
※ 등주 ~ 오골강 : 총 1,300리

K
또한 오목도(烏牧島)와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의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長口鎮)에 도달한다.
※ 신라 서북쪽 장구진은 명나라 개주와 복주 사이에 있던 신라채 (신라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인은 추정하고 있다
※ 패강구(貝江口)는 패강 입구로, 이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요사지리지에도 요동에 패수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L
또한 진왕석교(秦王石橋)와 마전도(麻田島)와 고사도(古寺島)와 득물도(得物島)를 지나는 1000리를 항해하면 압록강(鴨淥江)의 당은포구(唐恩浦口)에 이른다.
※ 진왕석교 : 당태종이 건넌 요택의 물줄기 가운데 하나인 발착수와 관련한 유적으로 본인은 추정한다. 진왕은 당태종을 높여 부르는 별칭이므로 진왕석교는 당태종과 관련한 명칭이 분명하다
※ 오골강 ~ 압록강 당은포구 : 이 거리가 1,000리라는 말이 아닐 것으로 본인은 추정한다 1,000리의 거리에 비하여 중간 기점의 수가 매우 적다. 요택 지역인 오골강에서 해안을 따라 현 압록강에 도달하려면 1,000리보다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 따라서 본인은 이 1,000리를 도리진 ~ 압록강 당은포구 거리로 보고, 오골강 ~ 압록강 당은포구 거리를 200리라 해석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아래의 N과 M의 저항에 부딪힌다

M
압록강 당은포구 ~ 신라 경주
ㅡ 육로 동남 700리
※ 이 기록에서 압록강은 현 압록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나 그 거리를 보자면 700리로 너무 짧다
※ 당시의 거리척인 1리 = 500m를 적용하더라도 너무 짧다
※ 그러나 등주~요하의 해안 거리를 1,300리로 잡은 거리 감각으로 보자면 가능성은 있다 이 거리 감각은 상기 L 에도 적용할 수 있다

N
압록강(鴨渌江)의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는데 발해(渤海)의 경내이다. 또한 물길을 거슬러 500리를 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성(城)에 도달하는데 옛 고구려의 왕도(王都)이다.
ㅡ 여기에서 가탐도리기의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을 가리킨다는 증거가 작동한다
ㅡ 이 해로의 기록과 육로의 기록을 종합할 때에 육로 기록에서 안동도호부 (심양) ~ 평양 동남 800리에서 평양은 환인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 즉 가탐도리기에서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 평양은 환인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 이러한 이유는 압록이라는 명칭을 지닌 강이 두 곳이었거나 신라가 고구려의 요동지역을 차지하지 못 하면서 그 서북계 천참을 뜻하는 압록강이 본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압록강으로 명칭이 밀렸다 볼 수 있다
※ 또한 압록강의 이 경우와 비슷하게 '평양'이라는 지명 자체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고구려도 여러곳이었고 신라 영토 내에서도 삼한통일 전쟁 훨씬 이전과 그 후 고구려 수도로서의 평양을 차지하지 못한 후기신라에서도 평양 명칭은 여러곳 등장한다
※ 따라서 고구려 압록강, 평양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면 이 함정을 잘 피해야 할 것이다

3. 요사 & 요사 지리지

A
압록강
ㅡ 요양ㆍ심양 근처
ㅡ 무순ㆍ철령 근처
ㅡ 강동6주 근처

B
요ㆍ심 ㅣ 압록강 ㅣ 여진국
(서) ------------------------> (동)

C
요ㆍ심 ㅣ 압록강 ㅣ 강동6주(고려)
(서) ------------------------> (동)

D
강동 6주
ㅡ 헌 혼하 상류 및 청하 동쪽 ~ 장춘 이남

E
고구려 장수왕 평양 & 고구려 멸망기의 평양
ㅡ 동경요양부 관할 지역
※ 본인은 이 기록을 현 요양시가 아니라 동경요양부 관할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4. 독사방여기요

요동성ㅡ요양 북쪽 70~100 리
비사성ㅡ요양 서남쪽 120리
개모성ㅡ요양 서남쪽 240리
안시성은 개모성 동북쪽 70리, 요양 서남쪽 170여 리
오골성은 안시성 동남쪽, 바다와 가까움
오골성은 안시성에서 압록강과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건안성ㅡ개모성 동남쪽, 요동성 서남쪽 300리, 가탐 안동도호부 서쪽 300 리
평곽성ㅡ개모성 남쪽
남소성은 요양 남쪽 600리, 바다 북쪽 120리
신성은 남소성 서쪽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
요수ㅡ요양 서쪽 160리, 광녕위 동쪽 200리
요수는 현 요하
광녕위는 요양 서쪽 420리, 비사성 북서쪽 240리, 남소성 서북쪽 720리
광녕위는 현 금주(요하 서쪽, 조양 남쪽)시
남소성(금주)은 현 요동반도 진저우(金州)만

5. 삼국사기 지리지 & 고려사 지리지

ㅡ 고려사 지리지는 현 북한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이자 위만과 기자의 왕험성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ㅡ 고려가 현 평양을 개발한 것은 왕건 때부터로 이후 근 1백여 년 간 도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 시키고 계속하여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였다
ㅡ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평양을 차지한 기록이 전혀 없다
ㅡ 애초에 평양은 당나라 몫이고 신라는 패수 이남, 그러니까 평양 이남을 약속 받았을 뿐이다
ㅡ 뿐만 아니라 신라는 이 패수 이남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 했으며
ㅡ 당나라와 적대관계로 있다가 발해ㆍ당 전쟁에 참전하면서 당으로부터 다시금 패수(니하)이남의 땅을 재공인 받았을 뿐이다
ㅡ 그러나 물론 요동은 발해 차지였다
ㅡ 명나라 개주 남쪽 바닷가의 '신라채(신라새)'는 이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인은 추정하고 있다
ㅡ 따라서 패수와 고구려 수도로서의 멸망기 평양의 위치 역시 이 신라채 북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ㅡ 신라는 평양을 차지하지 못 했으므로 고려 왕건의 평양은 고구려 수도로서의 평양일 수가 없다
ㅡ 고려가 요동에 진출한 것은 발해 멸망 후 10세기 중반 광종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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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2-06 10:44
   
도배시러 18-02-06 12:29
   
삼국지 하후돈을보면
기병운용시에 천리 이동 6일... 5백리 200km 3일

사마천 사기를 보면
걸어서 천리를 이동하면 보병의 절반이 탈영.
     
감방친구 18-02-06 12:51
   
뛰어서 도주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보니 말을 탄 것은 아니네요

저 450리는 삼국사기 기자인 당시 고려시대 사가들이
1) 당시 고려 서경을 고구려 평양으로 인식하고
2) 고구려 당시의 살수를 청천강에 비정하면서
3) 요동의 압록강(태자하)과 청천강 사이의 거리를

삼국사기 해당 기록에 삽입한 것으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수ㆍ당 침략 전쟁 기록을 보면 압록강과 평양이 가까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450리는 삼국사기 사서 기자들이 삽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각됩니다

신당서나 통전에서 동일 기록을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죠

동일 기록이 나와도 우스운 겁니다

하루밤낮을 뛰어ㅡ이건 수사적 표현일 가능성을 염두할 필요도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2-06 12:54
   
뛰어서 200키로 도주 ㅎㅎ
무슨 산길 험지를 울트라 마라톤 하는 것도 아니고
          
도배시러 18-02-06 13:00
   
뛰어서 그게 가능하다면...
기병+보병을 동시에 운용 가능하다는건데...  세계최강
               
감방친구 18-02-06 13:03
   
그 세계최강이 영혼까지 탈탈 털렸네요 ㅎㅎㅎ
          
인류제국 18-02-06 13:47
   
그러게요 ㅎㅎ

게다가 그당시는 터널도 없고 도로 교통 시스템도 발달이 되지도 않았으니
도배시러 18-02-06 13:09
   
여기서 주류나 재야 사학자들이 UFO 운용설을 간혹 들고 나오죠.
인공위성 지도로 직선거리를 찍어서 상황을 유추하는 미친 분들이 간혹 나오는데...
지리정보 작성한 사람들이 UFO 타고 다녔다는 발상을 주장하는 순간... 미친거라 보면 됩니다.

지금도 서울-부산 인공위성 직선거리 320km, 자동차로 400km 입니다. 도심-도심
산을 관통하는 터널과 강을 이어주는 다리가  없다면 더 돌아가야죠.
도배시러 18-02-06 15:49
   
백제 무왕 13년(서기 612)
13년(서기 612), 수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임금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였다.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은 두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여름 4월, 궁궐 남쪽 문에 우레가 쳤다.
5월, 홍수가 나서 사람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네이버 지식백과] 무왕 [武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을 위해 요수를 건너는것을 백제가 어찌 알았을가요 ?
     
감방친구 18-02-06 16:46
   
그거야 수나라 육군이 요수를 건너기 전에 연락책이 작동했겠죠
우리가 지금 건너가니 너희도 준비해라 하는 식으로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할 때는 백제군도 당나라 편에서 같이 싸우기도 했잖아요 수나라 때처럼 관망만 한 게 아니라
          
도배시러 18-02-06 19:32
   
백제는 황금칠한 갑옷을 당나라에게 준거 외에 없을텐데요.
백제-고구려-말갈이 연합하여 신라지역을 협공한 기록은 보입니다.
               
감방친구 18-02-06 19:38
   
이때 백제가 황금색으로 칠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 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황제와 이세적의 군사가 합세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상>

황금칠 쇠갑옷도 바쳤고 전투에도 참가했네요
                    
도배시러 18-02-06 19:47
   
그게 645년 5월인데...
4. 의자왕 5년(서기 645)
5년(서기 645) 여름 5월, 임금이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자왕 [義慈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주력군을 보낸게 아니라... 선비 士 를 보낸거네요

이때 백제가 황금색으로 칠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 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百濟上金髹鎧 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士被以從 : 선비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감방친구 18-02-06 19:49
   
선비도 군사로 볼 수는 있으나 별다른 전투 얘기 없이 종군하였다라고 돼 있는 것을 보니
말 그대로 종군을 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겠네요
칼리S 18-02-06 17:21
   
님이 적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면 살수는 청천강이 맞습니다.

일단 그 당시의 이동로를 모르겠지만, 구글맵을 이용해서 안주와 의주사이를 도보로 이동하기 해보면 167키로 36시간으로 나오는데, 전력을 다해 도주했으니 충분히 하루면 가능하겠죠.

그리고, 고구려 멸망시의 평양은 현 평양이 맞습니다. 고려나 조선의 역사인식 자체가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고려나 조선이 조작을 할 이유가 없고요.

현 평양은 수도로서 매우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일단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인 중국세력과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좋고, 생산력이 뒷받침 되는 곳이죠. 당장 평양이 요동에 있었다면, 수나라나 당나라의 침입에 쉽게 점령당했을 겁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가 내분도 있었지만, 백제의 멸망으로 신라가 전력을 다해 당군을 서포트(식량 수송)함으로써 당군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식량 수급이 원활해져서 장기전이 가능해졌고, 이에 고구려가 결국 항복한거죠.

애당초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으면 신라군의 도움이 필요가 없었죠.
     
감방친구 18-02-06 17:42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야 저로서도 오히려 속 편하죠

지난 해 여름부터 삼국사기를 시작으로 사서를 탈탈 털어서 이 문제를 탐구해 오고 있는데

'고구려 평양(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의, 즉 제 1 수도로서의,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려 한)=고려 서경=현 평양' 설에 부합하지 않는 기록들이 나타나니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현 평양이 고구려 시대의 평양 가운데에 하나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 평양이 여러 곳으로 나타나고
심지어 현 서울일대도 평양이었고, 신라 중기 신라 영토 내에도 평양이 보이고 하는 등 난벌 지형을 가진 곳을 평양이라 칭했으며 여기에서 평양이 여러 곳 등장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우선 현 평양은 왕건 때부터 근 1세기에 걸쳐서 대규모로 개발이 된 곳입니다 궁궐, 성곽 등을 짓고 백성을 이주시키면서 고려 전기에 대대적으로 개발된 곳입니다

또한 기자사당과 무덤도 고려 시대 원 간섭기에 처음 지어진 것이고 이것이 고려 말을 거쳐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일단 여유를 가지고 고려와 조선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여 현 평양 = 고구려 수도로서의 평양 설의 성립 근거를 찾고 또 따져서 양측을 대조하여 볼 생각입니다
          
칼리S 18-02-06 18:14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의 평양이 도대체 어디죠?

요동지역에는 애당초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고구려 왕궁터라든지 집안처럼 무덤군이라든지 말이죠. 고구려의 대중국 전술의 기본이 청야전술이고, 이는 수도 평양이 한반도내에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죠.

명나라 시기에도 요동일대는 방어적으로만 중요한 지역이었을뿐 딱히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명 조정이 어려워져 요동에 대한 지원이 끊기자, 명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청에 다 투항하죠.

후한말 공손씨 세력이 요동에 근거지를 두고 활개를 쳐도 조정이나 주변 군벌들이 신경을 안 쓴것도 딱히 풍족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좋은 땅이 아닙니다. 현 평양같이 좋은 땅을 놔두고, 굳이 그런 땅으로 천도한다는게 말이 안되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이 백제를 친것도 결국 고구려의 수도 평양 공략을 위해서입니다. 당이 신라를 위해 그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여서 백제를 멸망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죠.
               
감방친구 18-02-06 18:20
   
저도 지금 찾고 있어요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토대할 때에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보이는데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지럽게 애를 먹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2-06 18:27
   
후한말 공손씨 세력이 요동에 근거지를 두고 활개를 쳐도 조정이나 주변 군벌들이 신경을 안 쓴것도 딱히 풍족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좋은 땅이 아닙니다. 현 평양같이 좋은 땅을 놔두고, 굳이 그런 땅으로 천도한다는게 말이 안되죠.

ㅡ 이거는 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네요
ㅡ 이 지역은 위만조선 이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ㅡ 기원전 1세기에 한 요동ㆍ낙랑ㆍ현도의 인구수만 근 100 만 명이었습니다
ㅡ 이 지역이 경제ㆍ군사적으로 중요처가 아니었다면 공손씨가 그렇게 세도하기 어러웠고
ㅡ 공손씨ㅡ고구려
ㅡ 모용선비ㅡ고구려가
이 지역을 놓고 오래 각축을 벌일 일도 없었습니다

전쟁의 이유는 거의 모두 돈 때문입니다

거란의 동단국도 발해의 만주ㆍ연해주 다 버려두고 요ㆍ심 지역만을 고수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강하가 발달돼 있고 산곡이 깊어서 교통에 좋고, 금광ㆍ은광ㆍ철광 등이 산재해 있습니다
                    
칼리S 18-02-06 18:40
   
저기여 요동지역은 풍족한 땅이 아닙니다.

요서 지역이 평야지대고요. 그러나 요서지역은 방어하기가 힘들기에 요동에 근거지를 두는거죠.

요동성은 누가 머라해도 고구려의 대중국 방어 1선이고, 이 요동성이 수도는 아니죠.

요동성과 압록강 사이에는 결코 고구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애당초 없는데 찾을려니 문제인 겁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낙랑은 평양이었다고 생각하기에 님과는 답이 다르죠.
                         
감방친구 18-02-06 18:43
   
낙랑을 서북한에 두는 설을 채택하여 낙랑군을 빼고 요동ㆍ현도만 쳐도 인구가 엄청납니다
한서 지리지를 한번 찾아보세요

그리고 고구려 방어선은
ㅡ 1차 요수
ㅡ 2차 요동성
ㅡ 3차 안시성
ㅡ 4차 압록강
ㅡ 5차 살수

이렇게 구성됩니다
이를 줄여서
ㅡ 제 1방어선 요수
ㅡ 제 2 방어선 요동ㆍ안시ㆍ건안성
ㅡ 제 3 방어선 압록ㆍ살수

이렇게 됩니다
                         
칼리S 18-02-06 19:01
   
한서지리지를 참조해보시면 요동이나 현도가 다른 유주 군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수가 적은걸 알 수 있습니다. 즉 좋은 땅이었으면 인구가 많겠죠. 낙랑이 요동이나 현도보다 인구가 많고요.

누차 말하지만 방어선이란게 결국 수도를 지키는 방어선이고, 이는 고구려의 평양이 현 평양성이라는 걸 말해주는 겁니다.
                         
감방친구 18-02-06 19:05
   
위만조선 시기와 멸망 후 이탈한 인구도 고려하셔야죠
그리고 그 당시 기원전 1세기에 인구 수십만이 몰려 있는 게 흔했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 전개도 같이 고려하셔야죠
                         
감방친구 18-02-06 19:11
   
잘 알겠구요
님도 향후에 평양 관련하여 연구하는 내용이 있으면 이곳에 올려서 공유해주세요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칼리S 18-02-06 19:30
   
그 인구가 맞는지 틀리는지 확실하지 않기에 상대적인 분석을 말한겁니다. 당연히 인구수를 그대로 믿으면 안되고, 상대적으로 생각하셔야죠.

한서지리지상에서 하북의 중요군들은 100-200만이나 됩니다.

유주의 발해군만 해도 90만이 넘습니다.
                         
도배시러 18-02-06 19:39
   
한서지리지 인구가 많으면 뭐하나...
당나라 초기는 1/20로 줄어든 인구분포를 가진 지역이 되버리는데...
     
감방친구 18-02-06 17:54
   
식량, 즉 군량미의 문제는 수나라 침략 때부터 불거진, 즉 패인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수나라는 군량 수급 문제로 패하는데
이들이 요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지 못 해서 군량 수급에 어려움이 따랐고 이게 패인이 됩니다(사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게 삼국사기인지 중국 측 사서인지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당시 수나라는 요서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지 못 했습니다
수서 지리지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당태종의 당군 역시 요서에 거점을 지니지 못한 상태였고 삼국사기 기록 (신당서와 통전의 기록을 교차해서 삽입한 기록)에 보면 정확한 지명이 나오는데 애초에 당군의 군량미가 집결한 곳이 난하 근처입니다

이후 요수를 건넌 당태종이 평양을 진공하지 못한 이유가 요동성에 본진을 두고 있었으나 안시성 등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전선을 펼치지 못한 이유에 따른 것입니다 요동성에 본진을 두고 있는데 안시성을 두고 평양을 곧장 진공하면 군량미 수급 뿐만 아니라 후위가 털려버리니 발이 묶여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후에 신라가 군량 수송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죠

당시 고구려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닐 가능성은 신당서와 통전 등을 토대한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기록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상정됩니다

시간을 내어서 한번 일독해 보세요
     
신수무량 18-02-06 18:00
   
역사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우고 이해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현이 확정적이시군요....내용 중에, 167km를 도보로 36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라고 이해한다는게 어이가 없군요. 100km 행군해보셨나요? 전력을 다해 도주하면 167km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생각이야 자유지만...)
구글 어스로 한번 그 가는 길의 형태가 어떤지 한번 봐 보시면 아시겠지만....그 가는 길에 대련강이라고 큰 강도 건너야하고 가는길에 산도 넘어야하고 령(岺)도 넘어야 합니다. 구글지도는 그런거 무시하고 사람이 평지에서 걷는 속도(약4.7km/h)로 단순 계산해서 쉬지 않고 식사시간도 없는 상태로 35시간으로 단순 계산되어 나온겁니다. 보통은 그냥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죠.
평양이 요동에 있지 않아야 할 이유는 뭘까요? 요하(현 요하)가 아주 안성맞춤 방어역할 했다고 생각은 안하시는지?
고구려와 백제가 당에게 망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배신자때문입니다.
          
감방친구 18-02-06 18:18
   
167km를 도보로 36시간

ㅡ 이거는 사실 군대를 다녀온 상식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말도 꺼내지 못할 말이죠

ㅡ 일반 도로 행군도 아니고 거개가 다 산길이고 숲길인데

ㅡ 제가 군시절에 지리산 종주를 하는데 지도상 거리가 회엄사~천왕봉~대원사 코스가 78km인가 그렇습니다
ㅡ 그런데 이거 2박 3일 걸렸습니다 물론 잠 자는 시간 빼면 무박 2일에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167km를 하루에요? 혹은 36시간?
ㅡ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지도상 5km인가 하는데 화엄사에서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고 4시간인가 5시간 걸려서 노고단에 도착해서 숙영지를 편성했습니다
          
도배시러 18-02-06 19:27
   
167km를 도보로 36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라고 이해한다는게
==> 이런식으로 접근하는 분들을 UFO 광신도라고 합니다. 맘만 먹으면 불가능한게 없죠.
     
감방친구 18-02-06 18:07
   
고구려 본진을 공격하는 침략로는 모용선비 시절부터 두 곳입니다

하나는 북쪽 ㅡ 요하 중상류를 건너 심양을 거쳐서 들어가는 길

하나는 남쪽 ㅡ 요하 하류, 즉 요택을 건너서 안시성을 거쳐서 들어가는 길

만약에 고구려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ㅡ 압록강 서쪽에 본진을 두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ㅡ 그 본진이 있는 압록강 서쪽이 요동성과 가깝거나 요동성이라는 표현 정황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수나 당 모두 본진을 요동성에 두고 있었어요
제가 억지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중국 사서 기록을 교차 편집한 기록인 삼국사기 영류왕, 보장왕 때의 기록을 보시면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 고구려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요동성에서 무순ㆍ철령 라인을 거쳐 진공하여 환인지역까지 뻥 뚫린 길을 따라 내려와서 압록강 중상류를 도하하지 왜 요동성에 본진을 묶어두고 안시성ㅡ건안성에서 매번 애를 먹었겠습니까? 이미 당군은 요동성과 그 동북쪽의 중요 성인 개모성, 신성을 접수한 상황이었는데?

안시성 근처에 오골성이 나오고 오골성 근처에 바로 압록강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를 가탐도리기와 교차해 보면 오골강이 있는데 이 오골강은 요하 하류 일대예요
     
감방친구 18-02-06 18:11
   
"애당초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으면 신라군의 도움이 필요가 없었죠."

ㅡ 수서 지리지와 신당성, 구당서 지리지 등을 보시면 수와 당은 당시에 요서에 거점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난하 정도가 저들의 동쪽 한계선이었고 난하와 대릉하 사이는 국경지대화 돼 있었습니다

ㅡ 즉 전선이 현 북경에서부터 요동까지 2천여리나 길게 늘어져 있었던 것이죠
감방친구 18-02-06 19:13
   
도배시러님이 작성하신 전한 인구 지도

history2 18-02-06 21:23
   
평양은 어디일까요?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각 사서별로 추정위치가 다르니....결국은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이 되야 해결이 될 문제인데요.....저도 평안도의 평양설은 지지하지 않습니다.....소위 남평양 정도(고려시대 개경 밑 남경 같이요) ....로 추정이 되는데요....혹시 서안평이 평양의 위치가 될 수는 없을지요? 저는 그 지역을 비정해 보는데......요!
징기스 18-02-09 10:59
   
감방친구님 내공이 정말 보통이 아니시네요 대박!! 님 같은 분들이 우리나라 사학계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꼴통 갱단들이 다 장악하고 있으니 정말 분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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