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단순히 제국이었느냐 왕국이었으냐 따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하는 면을 따져 봐야 합니다
기록이 적어서 유물, 유적에 의존하는 바가 큰데
러시아 학계의 발굴 성과에 의하여
발해는 그 영역이 기존 학계 통설과 달리 연해주 전체와 남시베리아까지 아우르는 매우 거대한 나라였다는 것,
그리고 발해의 상경 유적 등에서 보이듯 그 규모와 금석문에서 이 나라의 부유함과 이 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것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발해는 8세기 동북아의 '당 ㅡ 거란 + 돌궐 ㅡ 발해'의 정세 구도 속에서 거란과 돌궐을 견제하려는 당의 이해관계와 발해를 고립시키려는 당의 시도에 대한 발해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공세 속에서 나라의 틀이 잡혔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가 대체 무얼 근거로 먹고 살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데요
문명화된 국가라는 것은 무역을 해서 먹고 삽니다 통상이 있고 통상로가 있어야 재화가 유통되어 쌓이죠
그러면 발해의 통상에 있어서의 요충지는 어디겠는가
이거는 거란의 동단국을 보면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2년 후에 요양으로 그 수도를 옮겨가 만주가 밀림화됩니다
옮겨 가기 전부터 밀림화가 되어 도로가 끊기고 교통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 돼 버린 것이죠
그 이유는 재화가 나고 드는 길목을 거란이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그 재화가 동단국이 아니라 요나라로 빨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요서와 요동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이미 위만조선 시대부터 경제적 중심지였습니다
만주의 산물과 초원의 산물과 중원의 산물이 만나는 곳으로 한나라 요동ㆍ낙랑ㆍ현도 3군의 인구만 해도 기원전 1세기에 근 100 만 명이었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멸망시키는데 평양을 비롯한 일부 성만이 항복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때문에 69만 호라는 것은 당에 항복한, 고구려 중심지의 인구만 해당한다 봐야 타당할 것인데 최소 350 만 명 이상, 최대 700만이 이 지역에 모여 있었습니다
강하가 발달하였고 금광, 은광, 철광 등이 산재한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