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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3 14:20
[한국사] 삼국시대 관련 질문인데요
 글쓴이 : 남해
조회 : 871  

궁금한 건 당시엔 지금처럼 명확한 국경선이 없었잖아요? 대충 크게 국경선을 긋고 군사들이 대치하긴 했겠지만, 예를 들어 백제인이 신라 영토로 들어가고 신라인이 고구려 영토로 들어가도 대놓고 상대 국가의 군인에게 국경선에서 적발되지 않는 이상 별문제 없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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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위해 17-12-13 14:39
   
제가 알기엔 성안으로만 안들어가면 아무 문제없었던거로압니다. 더욱  이동이 없던때라 얼굴이 신분증이었을거에요.
도배시러 17-12-13 14:39
   
온조왕 42년(서기 23)에 남옥저의 20여 집이 와서 백제에 투항하였다.-삼국유사

인구이동은 장려했구요.
군사 스파이 "세작"에 관한 기록은 발견 못했네요.
     
내일을위해 17-12-13 14:42
   
엥?  인구이동 엄청 통제한걸로 아는데. 저건 투항이죠.  당시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권력의 상징으로 알았던걸로 압니다. 그래서 몇호를 지배하는 호족이냐로 세력을 가늠한거 아니었나요?
          
도배시러 17-12-13 15:04
   
실수... 인구유입을 장려했죠. 인구 이탈은 금지고요.
감방친구 17-12-13 15:08
   
현대의 감각으로 전근대를 보지 마시구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근현대 문명의 혜택을 제하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구들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으니 산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을 것이고
망원경도 없지 전화기도 없지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을 보시면 전쟁이 나거나 나라가 망하거나 재해를 입거나 하면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 명씩 월경을 하는 기록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또 전쟁을 통해 타국의 백성을 끌고 와서 살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요나 금이 고려에게 고려로 넘어간 자국 백성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한 기록들도 보이고요

백성은 국가의 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질 않았어요

하다 못해 몽골조차도 몽골침략기에 학살을 하지 않고 농사일을 거들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려 했다잖아요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왜구들의 이미지가 우리 인식에 편견을 남긴 거 같아요

우리 삼국 시대만 해도 기술자, 승려 등의 고급인력들 교류가 많았구요
     
남해 17-12-13 16:16
   
함부로 죽인다는 말은 한 적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군인이 타 국가 영토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일반 백성이 자기 영토에 들어왔다고 해서 죽이진 않았겠죠. 다만 삼국의 백성들 모두 자유롭게 이 나라 저 나라 영토 아무 문제 없이 드나들면서 원하는 나라에 정착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일단 감방친구님 말씀대로 수상한 사람이 아닌 이상 농사지으면서 살게 했을 것 같네요.
          
감방친구 17-12-13 17:08
   
예,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몇 명 단위까지 관청에 보고가 되거나 조사를 했더군요

고려사를 예로 들면 어느 지역에 여진족이 들어와 돌아댕기는데 왜 들어왔는지 조사를 했고 식량이 필요하다 하면 식량을 줘서 돌려보냈고 고려에서 살려고 왔다 하면 살게 했더라구요 나중에는 요와 고려 사이에서 단물만 빼 먹으며 왔다리갔다리 하는 여진족이 많아서 받아주지 말라는 얘기도 나오고 또 이주해서 살려고 온 여진족을 그곳 관리가 죽여서 문제가 되기도 했구요

국경에서 걸러지지 않더라도 차후에 관청에서 조사관리가 됐더라구요
          
감방친구 17-12-13 17:13
   
삼국사기 기록만을 보자면
이런저런 이유로 못 살겠다 하여 도망을 가면
그 도망 간 나라에 백성을 돌려보내라 요구를 하고 받은 나라는 못 주겠다 하며 때로 전투까지 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사례는 주로 신라와 백제 사이에 많더군요

남의 나라 백성이 이주해 온 경우는 뭐 두 손 들고 땡큐죠
               
남해 17-12-14 11:26
   
감방친구 님 좋은 답변 감사드려요.
윈도우폰 17-12-13 15:23
   
선으로 그어지는 국경이란 개념은 서양개념입니다. 동양은 선이 아닌 면의 개념으로 국경 즉, 변경이나 변계를 설정했습니다. 측량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국경선을 긋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진시황처럼 장성을 쌓고 국경을 만든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지요. 대충 산등선이나 하천을 기준으로 국경을 설정하는 것이고, 평야에서는 그냥 공유합니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북만주의 변계지역도 그렇고...현재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도 공유되는 변경이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국경개념이 없을 때 선긋고 우리 땅, 우리 바다라고 선언하기 시작한게 왜나 대만으로 쫒겨가기 전 자유중국이라는 얘들이었지요.
비좀와라 17-12-13 16:44
   
삼국시대 정도는 어느 나라나 마찮가지로 성읍을 중심으로 사방 몇리 만이 통제 되었지 그 이상은 사실상 자유방임 지대 였다고 보심은 됩니다.

단체로 움직이지 않으면 사실상 알 수 없고 통제가 되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호패제도가 시행 되면서 약간의 통제가 이루어 지는데 이 것도 사실상 관문이나 성읍을 통과 할 경우에만 필요하지 그 외는 거의 이용이 되지 않았다고 하죠.

이건 현대에도 마찮가지고 국경선 만 통과하면 사실상 자유 방임 상태 입니다. 한국과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휴전 상태라 상당한 통제가 이루어 지는 것이고 그 외의 평화적인 상태의 국가들은 특별한 통제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일본도 전국시대 같은 경우나 상당한 통제가 이루어 졌지 그 외 경우는 상당히 자유로운 상태 였다고 하죠.
꼬마러브 17-12-13 17:07
   
물론 삼국시대 당시의 국경이 지금과 비교하면 허술하고 명확하지는 않았겠지만...

반대로, 당시의 국경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무주공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도 바르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타국에 사신을 보내다 다른 세력에 방해받아 실패했다는... 등의 내용은, 사서 기록에서 빈번히 발견됩니다.
     
비좀와라 17-12-13 17:30
   
바로 그런 기록이 통제가 이루이 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만일 통제가 이루어 졌다면 그런 일 생기기 쉽지 않겠죠.
          
꼬마러브 17-12-13 17:42
   
백제 문주왕이 남송에 사신을 보내다 고구려에게 방해받아 실패했습니다.
고구려가 대국에게 사신을 보내다 모용부에 방해받아 실패했고요.
삼국시대 말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때문에 사신을 못 보낸다며... 당나라에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서양은 국경이 확연하지 않았지만
동양은 일찍이 전제군주권이 확립되고 국경이 생각보다 명확했습니다.
물론 지금과 비할 바는 아닙니다.
               
꼬마러브 17-12-13 18:04
   
즉,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국가의 통제권이 희미해질 때는 국경의 개념이 허술해졌겠지만...
평상시에는 타국의 사신을 붙잡을 정도의 국경 개념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잡설로, 『삼국사기』에서 말갈이 백제나 신라 등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고대에는 국경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라고 일축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순 억지라는 거죠.

아무리 당시 국경 개념이 지금과 비교하면 허술했다고 하더라도...
중간의 고구려를 무시하고 군대를 이끌어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건 말갈의 성격이나 위치를 통설과 다르게 상정할 일이죠.
                    
의로운자 17-12-13 22:24
   
저는 이건 고구려라고 봐야한다 생각합니다. 옛날에 어떤분이 말갈이 일개 도적처럼 표현한것처럼 느껴질만큼 사서에 등장하는 말갈은 전부 고구려라고 하더라구요. 고구려에 말갈부족들이 부족으로서 소속되어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병사를 이용해 싸웠다는 기록은 아주 많이 등장하지않습니까 고구려가 망한후 발해가 건국되기전까진 고구려를 말갈이라 부릅니다. 고구려라는 기록은 없고 말갈이란 기록이 나옵니다. 백제멸망후 그땅을 신라와 말갈이 나눠가졌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역시 고구려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도배시러 17-12-13 22:37
   
고구려의 이름이 여러개이기는 하죠.
맥국,  맥족, 고구려, 하구려, 구려, 고려, 말갈....
                         
꼬마러브 17-12-13 23:03
   
삼국시대 초기의 말갈은 낙랑국의 하수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아마 고구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맥=맥예=말갈 설에 입각하여 말갈을 예족으로 보거나
혹은 말갈이 본래 한강 지역 원주민이었다는 설이 저는 흥미롭게 보이더군요.

또는 말갈이 고구려 지방민의 속칭이라는 설 역시 타당하다고는 생각되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낙랑국과 고구려가 살수를 경계로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와는 국경을 마주하지 않았죠.

따라서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했던 말갈은 고구려와는 관계 없다고 보여집니다.
                         
감방친구 17-12-13 23:32
   
고구려와 백제는 그 건국 초기에 패수와 대수를 경계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또한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가 유리왕 때에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 시기 전에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ㅡ 고구려 건국(삼국사기 기준) 30 여 년 전인 bc75년에 기존 현도군이 3개 현만 가지고 요동군으로 교치가 됩니다
ㅡ 그리고 유리가 고구려에오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졸본을 떠납니다

저는 졸본을 지금의 환인이 아니라 의무려산ㅡ부신ㅡ철령 이 근방으로 가정을 하고 있는데

소서노 무리가 기존의 낙랑, 현도가 서쪽으로 밀려가는 상황에서 지금의 금주에서 요동반도 남부로 이동해 그곳에 처음 정착하여 그 후에 서북한 등지의 한반도로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북쪽에 말갈, 북동쪽에 낙랑이 있고 또 고구려와의 사이에 패수와 대수가 있었습니다(패수와 대수는 백제의 영역으로서 백제의 동북쪽에 있었습니다)
또 북쪽에 마수성이 있었습니다

마수성은 마수산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마수는 말머리로 말갈과 음가의 유사성 또한 엿 보입니다

또 패수는 한나라 패수현이 있고, 또 요동에 요나라 때까지 패수가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가 2 세기에 서쪽의 양맥을 정벌하여 복속한 기록이 있으니 이 양맥을 말갈로 본다면 사실이 부합한다 보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

백제 본기 온조왕
2년(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고구려 대무신왕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백제 온조왕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백제 본기 건국설화 부분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5224&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2
                         
감방친구 17-12-14 00:21
   
비록 아귀가 맞질 않지만 그래도 사실 기록을 늘어놓고 가정을 해 보는 것이죠

당태종이 요수를 건너서 마수산 밑에 진을 펼친 다음에 요동성을 공략하잖아요

마수산을 의무려산으로 보는 건 좀 대릉하를 요수로 볼 때에 한한 가정이에요

아무튼 제 가정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요동반도 남부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시적으로 낙랑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게 되는 것이죠

한나라 요동군은 요하 좌우에 걸쳐 있었고 현도군은 그 동북에, 낙랑군은 그 동남에 위치

조조가 유성의 오환을 207 년에 정벌하는데 요동이 200 년 가까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거든요
공손씨, 오환, 고구려 등이 득세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죠
                         
감방친구 17-12-14 00:25
   
어? 꼬마러브님 댓글 지우셨네;;
아무튼 이어 가 보면

아래 기록 후로 200 여 년 동안 백제본기에서 낙랑이 사라집니다
즉, 낙랑이 교치돼 간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동시에 백제가 요서, 혹은 요동에 거점을 보유한
상태로 중심지를 한반도로 옮겨 간 것을 상정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왕의 어머니(소서노)가 죽고
도읍을 옮긴 연차의 사건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해석과 달리 원문에는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必將遷都가 아니라 必將遷國이라고 돼 있다
도읍을 옮겨야 한다가 아니라 나라를 옮겨야 한다고 돼 있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
백제 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꼬마러브 17-12-14 00:36
   
설명 감사합니다.
                         
도배시러 17-12-14 01:24
   
감방친구님...
조조가 유성의 오환을 207 년에 정벌하는데 요동이 200 년 가까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거든요
===> 이건가요 ? 무경십서
“이 길은 여름과 가을 모두 물을 담으니 얕다 해도 거마가 지날 수 없고 깊다 해도 배를 띄울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과거 북평군의 치소가 평강(平岡)에 있었는데 길이 노룡(盧龍)을 지나 요서의 유성(柳城)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광무제의 건무(建武) 연간 이래 도로가 파괴되어 통행이 끊긴 지 이미 200년 가까이 되어 오직 작은 길로 통행이 가능할 뿐입니다. 적들은 지금 우리 대군이 응당 무종현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전진할 길이 없어 철군할 것으로 알고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은밀히 노룡의 입구에서 백단(白檀)의 험한 길을 따라가면 적들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오히려 가깝기도 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여 기습공격을 가하면 답돈은 가히 싸우지 않고도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2-14 08:26
   
네, 맞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한나라 유성 찾다가
거기까지 갔네요 ㅎㅎ
진정해진정 17-12-14 01:43
   
우와.. 많이 배우고 갑니다.
논설문 감사드려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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