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활을
『삼국유사』에서는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며,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828)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4 장보고(張保皐)·정년(鄭年)조에서 관련 기록이 전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는 궁파(弓巴)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828)조에 의하면 성은 장씨이고 궁복(弓福)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열전 권220 열전145 동이 신라조에는 장보고(張保皐), 일본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張寶高)라고 하였다.
이렇게 사서에 따라 장보고의 이름은 궁복, 궁파, 장보고(張保皐) 혹은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본래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로 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 중 복(福)과 파(巴)는 신라계 이름에서 아이를 뜻하는 “보”의 차음표기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의 의미는 “활보” 즉 활 잘 쏘는 아이의 뜻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노태돈, 1978)
그런데 『삼국사기』의 세주와 중국측 기록, 일본측 기록을 보면 그의 이름이 장보고(張保皐) 혹은 장보고(張寶高)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가 중국에 들어가 궁복의 궁(弓)과 비슷한 장(張)으로 성을 삼고 복(福)자를 음이 비슷한 2자로 나누어 보고(保皐) 혹은 보고(寶高)라고 하여 이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今西龍, 1933) 특히 일본측 사료에서만 보이는 보고(寶高)라는 이름은 장보고(張保皐)의 동음이자 표기로서 그가 해상으로 부를 축적한 후에 스스로를 격상(格上)하는 의미에서 개명하였던 것이며, 이는 그의 이전 행적을 알지 못하는 일본에만 그 최후 성명이 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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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이름을 한자로 ‘궁복, 궁파’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궁’은 ‘활’에 해당하는 말을 훈으로 차자한 것이며, ‘복, 파’는 우리말 인칭접미사 ‘-보’를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장보고의 신분이 낮아서 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딸을 왕비로 삼고자 할 때 대신들이 신분의 천함을 들어 반대하였다. 출세한 후에 張씨 성을 붙였는데, 아마도 활을 뜻하는 弓자가 들어간 성을 일부러 골랐을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이름에 쓰인 ‘福’에서 받침 ‘ㄱ’은 묵음으로 본다. ‘巴’는 고대 시기에는 그 음이 ‘보’에 가까웠다.
또한 인칭접미사에 해당하는 ‘-보’를 ‘보고’로 개명하였다. 그냥 외자가 싫어서 뜻이 좋은 두 글자 이름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의 받침이 단순히 묵음이 아닐 수도 있다. 미세하나마 그 이전에는 인칭대명사 ‘-보’가 두 글자로 뒤에 /kV/에 해당하는 음이 있었는데 소실되면서 미세하게 받침 /ㄱ/이 남아 있어서 ‘복’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세한 받침을 무시하면 그냥 ‘巴’로 전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보고’라는 이름이 ‘福’의 미세한 받침소리를 반영하여 개명한 이름일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받침이 있는 한자로 받침 없는 우리말을 전사한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 그때마다 저 소리가 반드시 받침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