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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09 15:26
[중국] 만주족의 잔혹한 중국 정복사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4,620  

청조 학살.jpg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청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xx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가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강/ 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 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조주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각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순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순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뽀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한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xx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xx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xx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xx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이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양주성 공략. 양주성이 지옥으로 변해, 살해당한 자가80만여 명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 명의 만주족 사병을 만나더라도한인들의 수가 몇 명이 되었던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서 목에 칼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단 한 사람도 감히 도망하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사 한 명이50여 명의 청장년 남자들과 조우했는데, 청나라 병사가 칼을 빼들고 소리치자,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전전긍긍하며 감히 한 명도 움직이지를 못했다. 이 청나라 병사가 이 사람들을(포박하지도 않고) 처형장으로 끌고 갔는데 단 한 사람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단 한 사람도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형장에 도착하여, 청나라 병사가굻어라고 하자 전부 무릎을 꿇고 죽임을 당하였다.

 

전중국을 통털어현 아래 온전한 촌이 없고, 촌에는 온전하게 보전된 집이 없고, 집에는 온전히 보전된 남자가 없고, 온전하게 부인을 보전한 남자가 없었다.” 용감하게 반항하려는 충용지사는 전부 살해되어, 남은 이들은 순종에 익숙한 노예들이었다

 

참고로 사천성 즉 촉지방의 경우 이 시기에 대규모 학살이 이뤄져 당시 사천성 인구 700만명 명중 

살아 남은이가 50만명이 채 안되었다고 함. 그 결과 유비의 촉나라 이래 전통적으로 촉땅에 살던 토박이 사천인은

모두 멸종하고 현재 사천성의 주민들은 전부 청나라 시기 이주한 외부인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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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드 17-12-09 16:03
   
병자호란이 그정도로 끝난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ㄷㄷ
서기2020년 17-12-09 19:02
   
남한도 중국의 위성국가가 되려고 하는것 같은데
걱정 입니다
중국이 티벳트를 점령한후 티벳트 독립을 주장 하는자는 고문,처형이 수없이 이루어졌고  분실xx 하는자도
많았지요
한족들이 티벳트로 대거 이주 해와서 지금은 티벳트인 보다 한족이 더 많다고 합니다
티벳트인 없는 티벳트 독립 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공산국가에서 사유재산은 대부분 국가로 귀속 됩니다
6시내고환 17-12-09 19:26
   
저렇게 강하던 만주족이 다 어디간건지...
촐라롱콘 17-12-09 19:48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xx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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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에 의해 정남왕에 임명된 이는 화종명이 아니라 경중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중명은 원래 모문룡의 수하였다가 모문룡이 제거된 이후 공유덕과 더불어 홍이포와 전선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당시 후금에게 취약한 부분이었던 화력과 수군전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킨 공로로

주로 칸의 아들, 형제, 조카들이 임명되는 팔기의 수장들인 패륵과 거의 같은 격으로 대우받았고,

후금에서 청으로 바뀐 뒤에는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물론 병자호란에도 후금에 투항한 한인들과 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특히 강화도공략과 가도정벌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청조의 입관이후 강남지역을 정벌하고 난 이후 경중명은 삼번의 하나인 복건지역을 관할하였으며,

그가 xx하고 난 뒤 그 작위는 아들 경계무와 손자인 경정충에게 이어졌습니다.
이해한다 17-12-09 20:01
   
이런 역사가 있는데 청나라가 지나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다니, 중국의 사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논리군요.
밥밥c 17-12-10 01:34
   
청나라는 본래 전쟁은 저렇게 하는 것이죠.

 학살을 기본으로 하던 청나라가 딱 동시대(1600년대)에 조선과의 전쟁에서는 상당히 말이 많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508


요약하자면 “우린 너네 조선이 시비 걸어도 자비롭게 참고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게 다 인조와 조선 조정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달아나거나 항전하지 말고 생업에나 종사해라”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시종일관 무시하고 있었지만, 청나라는 나름대로 우호적일고

 고민을 많이 했죠.

 이전의 왕조들도 고려와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해 왔기에 청나라도 조선과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한족)와 조선은 이전부터 당대까지 아무런 관계도 없었는데, 왜자꾸 명나라만 찾는지

 알 수 조차 없다고 하죠.
     
mymiky 17-12-10 03:13
   
일단, 님은 청나라에 상당히 옹호적인데..

조선이 청나라를 시종일관 무시하고 있었다?는 발언은 갸우뚱? 거리게 만듭니다.

한국이, 중국을 후진국이니, 짝퉁이나 만든다고 까지만..
중국이란 나라 자체는 강대국이란 것을 아주 잘 압니다.

조선인들은 분명, 여진족들을 멸시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여진족들은 부족 생활로 연명했고,
문화적 수준도 조선에 비할바가 못 되었을 정도로 낙후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도,

일단 부족이 통일되고, 후금이란 국가가 등장한 이후엔
마냥, 무시할 수준은 아니였습니다.

여진족 개개인들에 대한 호불호가 있더라도, 국경을 접하고
새롭게 등판한 신흥국으로써의 후금을 마냥 무시할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랑캐-라고 뒷담화하며 궁시렁 거리는거야,
어디까지나 우리들끼리 있을때나 하는 소리고,,

엄연히, 국가정책은, 청나라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가 요구한 물품들도 조선이 구입해 주었고,
청의 칸이, 황제라고 부르라고 한다고 하는 것도
"재는 뭔데, 황제냐고 하냐? 재들 많이 컸다 -.-"궁시렁 거리긴 했지만,,

역시나 공식적인 외교문서에는
청의 황제라고 청이 원하는데로 적어주었던 것도 조선이거든요.

조선의 외교정책은, 광해군과 인조 모두

명과의 이전관계는 그대로 가되, 청나라도 적당히 응해주며
최대한 관망한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청나라와 친하게 지냈는데,
인조는 그렇게 하지 못해 침략당했다는 전제가 틀린 것인데,

왜 대중들의 머리속에 이미지는,

[조선이 청나라를 무시해, 청나라가 화가 나서 침략했다.
그러니. 조선이 청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냈으면 청나라가 침략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찌보면, 상당히 우리 스스로의 자책으로 우리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내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강,간을 당한 것이다.. 내가 짧은 치마만 안 입었더라면
그런일은 안 당했을텐데.. 라고 하는 피해자의 심리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밥밥c 17-12-10 02:06
   
사실 '규원사화'의 서문을 보더라도 위의 청나라의 편지글과 의미가 상당히 비슷합니다.



고려 때부터 조공 바치는 사신을 수백 년 동안 북쪽에 보내면서도 이를 한스럽게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를 피 맺힌 원수로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출처] 규원사화 서(揆園史話 序)|작성자 디어헌터

http://blog.naver.com/deer382/60017360565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족으로 여겼는데 ,

 갑자기 조선시대에 와서 뜬금없이 만주족을 원수로 대한다는 것이였죠.

 게다가 중원의 '한족'과는 이전에 아무런 연관도 없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마치 같은 혈통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는 것이죠.
     
mymiky 17-12-10 03:26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동족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윤관의 여진정벌]은 무엇이였을까요? -.-;;

고려는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 모두 사대를 했습니다.
(물론, 사대란 것이 꼭 나쁘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안정을 취할수 있다면, 사대도 할수 있죠.

조선도 역시 고려처럼, 명과 청 양국에 사대를 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금나라는 고려한테 송나라와의 외교단절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양다리 걸치는걸 인정했지만..

홍타이지의 청나라는, 조선에게 명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더 강경했던 차이가 있습니다.

후금이 크고 있었지만,, 아직 산해관을 뚫지도 못 한 상태이고,
장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수 없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명과 관계를 다 끊어라고 요구한건, 조선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때 대만과 외교관계를 다 끊으라고 했을때를 생각해보면..
(물론, 대만 사이즈는 작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별로 영향이 없었으나,,)

명나라가 아무리 늙은 호랑이지만,,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명이 존재하고 있을 때라는 점을 간과하시면 안됩니다.
          
mymiky 17-12-10 03:34
   
또한, 중원의 한족과 이전에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정도밖에 안되었던 시점입니다.
왜란를 겪은 사람들이, 호란때까지 아직도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이 아직 우리주변에 남아있으며
징용 피해자들,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맺힌 절규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명나라는 재조지은의 은인이고,
수백만의 조선인들이 죽어갈때 군사적으로, 식량적으로도 원조했던 국가입니다.
(괜히 만력제가 고려황제라고 불리는게 아닙니다.)

꼭 이런말을 하면, 명나라 군의 갑질이 어쩌고 저쩌고 하겠죠?

우리나라에서 미군범죄가 있다고해서, 미군보고 다 나가라고 할수 없듯..

그것과는 별개로,, 명나라는 조선에게 있어 그런 나라예요..

미국을 보고, 우린 혈맹이라고 합니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혈통이 같지 않지만
피를 흘리고 싸워준 동맹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왜 중국의 한족이 조선인들에게 혈맹취급 받는게 이상하다고 하나요?

왜란이후, 급격히 줄어든 인구를 보완하고자,
청과의 싸움에서 명나라 포로들이며 투항자들이 조선에 엄청 망명해 왔습니다.

인구가 국력이고, 세금이고,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한 노동력 확충을 위해
조선 조정도 이들 명나라 망명객들을 적극적으로 받았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이 왜 명나라와 관계를 끊는 것이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 어려웠는가?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테판 17-12-10 02:12
   
저런 만주족이 이젠 거의 지나 한족들이랑 융화된거 같은데..몽고. 만주족한테 그렇게 살륙을 당해도 저리 인구가 많으니..진짜 바퀴벌레같은 번식력인듯..저런 역사가 있으니 서로 못믿고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짱개들이지..진짜 짱개들이랑 엮이기 싫다
관심병자 17-12-11 00:23
   
원래 남만주 지역은 우리민족과 인연이 많은 지역입니다.
고조선이 있었고, 부여가 있었고, 고구려, 발해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발해가 거란에 망하고, 발해 왕족과 유민을 고려가 받아들였고,
거란과 고려의 전쟁에 이지역 거주민들, 즉 여진족이 고려편을 들었죠.

거란의 요를 몰아내고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거란에 저항해서 일어났던 발해 부흥운동이 사라졌다는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금이 들어서면서 여진과 고려의 힘의관계 지위가 역전됐지만,
금과 고려는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몽골의 원나라때에 남만주는 잠시나마 고려의 영토가 됐었고,
그후 상속과정에서 고려에서 떨어져 나가 고려땅은 아니지만 고려왕족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몽골이 물러가고, 고려가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때
여진족의 지지를 받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조선초 까지 여진은 조선의 변방 개념 정도였고,
명이 여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할 당시  조선의 세력에서 이탈해 명으로 붙으려는 여진 부족들을 조선이 무력으로 응징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이 친명정책을 펴며,
명과 조선의 중간 완충지 성격의 여진에 대한 조선의 장악력이 약해졌고,
명나라가 혼란한 틈을타 후금이 건국 되었습니다.
왜란의 의리로 친명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고려때와는 달리 후금과 선을그었고,
청나라로 들어오며 힘에의한 지위 재정립이 되게됩니다.
이때 청나라가 조선에서 끌고간 사람에 대해,
조선인을 끌고갔다는 내용과, 조선내에 있던 여진인을 끌고 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진족은 고려시대부터 한반도로 귀화했으며,
세종의 통합정책으로 조선시대때 한민족에 동화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살던땅이 발해, 고구려, 부여,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니,
지역에 따른 문화적인 차이는 있을수 있겠으나, 한민족과 크게 다르다고 하기는 힘든 부족들입니다.

일제시대를 거치기전과 이후의 한국인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다릅니다.
임시정부에서 금, 후금, 청을 우리 역사라고 한것이 이런것입니다.
고려와 발해와 같은 관계가 계속 이어진것이죠.
위구르 17-12-15 14:18
   
프린트 해놓고 때때로 봐도 질리지 않는 위대한 업적의 기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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