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의 연구중에 재밌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사군이란게 설치됐다는것은 맞지만,
그게 정말 한반도까지 들어와서 설치되었는가 하는것.
한나라와 고조선의 전쟁의 결말에는 이상한점이 있습니다.
승리한 한나라 장수들이 모두 처벌을 받고,
항복한 고조선 무리들이 관직을 받고 상을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수 있는것은,
고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의 영향도 있지만, 고구려나 조선처럼 내부분열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않을까요?
정말 한나라가 전쟁으로 고조선을 모두 점령했다면 부여는 어찌된걸까요?
만주의 부여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어찌 한반도를 점령해서 군현을 설치했다는 걸까요.
중원 사서에 진한이 진국이라고 했고,
삼한이 진국이라고 했습니다.
또 위만, 기자조선 동쪽에 진국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동서남북 방위는 변하지 않고 변할수도 없습니다.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왕족들의 무덤에 진한(조)을 강조한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부여는 고조선 진한에 있었고,
부여(진한) 출신인 우리가 고조선의 적통이다란거죠.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이 부여가 있던 진한땅의 후손, 유민들이 세운 나라 입니다.
동북아 역사재단의 한반도 남부의 진국 위치 비정은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어찌 위만, 기자 조선 동쪽에 있었다던 진국을 동 시기에 남쪽으로 옮길 생각을 했을까요.
마한땅에는 마한왕이 있었고, 부여에는 단군이 있었습니다.
해부루, 해모수를 부여의 단군이라고 하죠.
이를 생각해보면 고조선의 중심은 부여가 있던 진한땅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고조선 분열 초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진한, 변한뿐아니라 온조의 십제(백제) 모두 마한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런 강한 세력을 가졌던 마한왕은 단군을 칭하지 않았습니다.
고조선의 진한, 마한이 모두 존재했으니,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붕괴된건 변한뿐입니다.
즉, 위만 조선이 고조선의 변한이고, 한반도 남부에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생겨났으니 고조선 진한의 일부역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게 옳겠죠.
해부루, 해모수의 권력 이양과 북부여, 동부여의 성립은 한나라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으니,
부여까지는 한나라의 전화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그럼 정리해보면,
고조선 삼한중 변한은 망해서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서 가야의 토대가 됐고,
진한 역시 피해를 입어 유민이 이동해 신라의 토대가 됐지만, 부여는 건재했고,
마한은 피해가 없었다고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어찌 마한땅에 한사군이 들어올수 있을까요?
다시 정리해서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던 진한.
진한땅의 부여가 건재했으니.
한사군은 부여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맞습니다.
이런 정리가 한국쪽 고서의 해모수, 고두막한, 북부여의 동명성왕 이야기와 맞아떨어집니다.
다시,
한나라는 왜 부여도 정리하지 못했으면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을까요?
지키기도 힘들텐데요.
낙랑이라는 명칭이 한나라에서 처음 도입한 명칭인가?
중원 사서에 기자조선을 설명하는 내용에 기자가 낙랑조선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낙랑이란 명칭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명칭인거죠.
일본학자들의 주장대로 낙랑이란 글자가 적힌 유물이 모두 한나라와 연관있다는것은 말이 안되는 억지입니다.
한국의 전쟁박물관에 미그기와 T-34같은 소련제 무기가 있다고,
앞뒤 다 생략하고 소련이 한반도까지 뻗어있던 나라였다고 주장하는것과 같은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