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회상을 봐야 할것 같네요.
숙종의 당시 상황으로 인한 희빈장씨의 중인계층의 왕비를 인정하지 못한 상위계급 또는 기존계급.
즉. 인조를 득위하면서 발생한 공신계열의 기득권을 탈취하지 않으려는 정치적모임,
희빈장씨를 앞세워서 공신계열을 타파하려는 움직임.
이때 사회상은 몇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임란이후 중인계층 특히 상인계층의 가파른 신분상승은
기존 땅을 위시로한 공신계열과 맥을 달리 하고 있었읍니다.
근데 문제는 숙종이후 공신계열측에서 내세운것이 바로 영조입니다.
초기영조의 정치를 살펴볼필요가 있었읍니다.
즉, 토지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만해소가 첫목표였다라는 것입니다.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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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계열의 중인층과 피지배계층의 농민계열의 차가 심해졌다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상인계열의 이득이 농민계열의 숫자를 감소하기에 충분햇다라는 것이죠.
상인계열은 특히 인력에 대해서 농민계열보다는 더많이 필요하면서 이에 대한 보수가 더나앗을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보부상의 득세가 한몫하고
후에 이런 상인계층의 권력적결합 및 귀속되면서 권력의 양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후 급속한 농민계급의 급속한 몰락이 예정되고 있엇고요.
즉 당시 사회상이 아직 상인계급의 주류로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라는 것입니다.
영조의 정치가 평세를 누린것도 상인계급의 물류 유통이 굉장히 원할히 돌아갔던것이 큰이유였을 것입니다.
즉 이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이들사이에서 껴있는 영조에게 힘을 준사람이 누구 였는가가가 중요합니다.
상인계급과 농민계급의 공존을 목표로 한것에 대한 억압적 사상에 굉장히 휘둘리게 되었죠.
아마도 영조자체도 농민계층을 더 생각한 입장이였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행적은 거의 상인계층과의 협의를 통해서 정치적목표를 이루려고 햇다라는 것이죠.
후에 정조는 이부분에 있어서 상인계층의 육성을 논하면서 영조의 균형적인 관리는 습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혜경궁홍씨는 정치적인 목표가 있었느냐 하는것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됩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관계가 좋지 못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인 바탕 근본사상이 전혀 달랐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영조의 사도세자박해는 혜경궁홍씨를 받아드므로 인해서 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해서 사도세자도 상당한 난관에 빠집니다.
가장 이상한 것이 왜.. 100여명이상 살해한 사람이 가장 주변에 있는 자신의 처를 죽이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