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음력6월22일
2차 진주성 전투
1593년에 들어서면서 왜군은 점점 불리해져 갔다
음력 1월9일에 평양성을 빼앗기고,
이후 음력1월27일에 벽제관에서 명군에게 승리하였지만
음력 2월13일 행주에서 조선군에게 대패한
왜군은 결국 3월달에 들면서 전부대를 경상도로 퇴각시키고 말았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에게
경상우도와 전라도의 공략을 명하는 한편,
명군과는 화친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장수들을 닥달하며
뭐라도 전공을 보이지 않으면 영지를 모두 몰수해버리고
가문을 멸문시켜 버리겠다는 등
협박을 하였다
이에 겁에 질린 왜군 장수들은 임진년에 자신들에게 큰 모욕을 안겨준
진주성에 보복공격을 가하여
뭐라도 공을 세워서 도요토미의 화를 피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울분을 풀려고 하였다
이때 화친협상을 진행 중이던 명군 장수 심유경은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왜군에게 공격을 중지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왜군은 진주성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오히려 진주성을 비워주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명을 회유하였다
이에 명은 조선 측에게 진주성을 차라리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키는게 어떻냐고 하였지만,
조선측에선 난색을 보였다
음력 6월 12일
이에 급히 명군 제독 이여송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주둔 중인 명군을 끌어모아
진주성에 보낼 원군을 꾸렸고,
선조 역시 현재 대기 중인 조선군을 최대한 동원하여 원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여송의 명군은 그 의지가 미약했으며,
황급히 달려오던 조선군 역시 왜군의 규모에 기가 질려 결국 병력을 돌렸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였던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역시
이런 개죽음은 당할 수 없다며 구원을 포기하였고,
행주전투로 도원수에 이른 권율 역시 도저히 시행할 수 없는 전투라며
구원을 포기하였다
전라병사 선거이, 전라 조방장 홍계남 등의 장수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과 의병대는 왜군의 의도를 의심하였고,
전라도 역시 함부로 내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진주성의 방위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명군도, 같은 편인 조선군도, 전쟁영웅들도 모두 기가 질려
싸울 엄두도 못낸 왜군의 규모는
자그마치 9만명이 넘었다
이는 개전 이래 왜군이 단일 전투에 투입한 가장 대규모의 부대였으며,
사실상 조선에 있는 전투가 가능한 전병력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간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왜 수군마저
출진하여 조선수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진주성 방위군은
창의사 김천일, 진주목사 서예원,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 여러 장수가 이끄는
관군 4천과
고종후, 양산숙, 이잠, 민여운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4천의
합이 약 8천이었으며,
백성들까지 합쳐야 겨우 6만이 되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