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음력 1월9일
4차 평양성 전투
왜군은 1592년 말,
음력 10월10일에 있었던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라도 진출이 무산되고
음력 12월 11에 독성산성에서 권율의 부대에게 패배하여
경기도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등
개전 초기 몇달간 유리했던 전황이 뒤집혀
전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졌다
한편 명나라에서도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원군 선발대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패퇴하자,
명의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파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마침 보하이의 난을 무사히 제압한 요동 주력군에
경략 송응창이 최고 사령관,
제독 이여송을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43000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군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도원수 김명원, 평안우방어사 김응서, 평안좌방어서 정희현이 이끄는 조선군 8천과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 2천2백과 합류하였다
그 병력이 자그마치 5만3천에 육박하였다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연합군의 남하에 부담을 느껴 황해도 각지의 왜군 부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이에 왜1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고니시는 급히 평양성을 요새화하고
평양성 옆의 모란봉에 조총부대 2천을 주둔시켜
수성 준비를 시작하였다
1593년 음력 1월6일
조명연합군은 서쪽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차례로 보통문, 칠성문, 모란봉을 공격하였다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함구문을 공격하였다
이때 명군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 승군이 거짓으로 패퇴하는척하다가
역공을 가하여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함구문을 공격하였던 조선군은 매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진짜로 패퇴하고 말았다
음력 1월7일
왜군은 3천의 병력을 동원하여
명군의
좌군 부총병 양호, 중군 부총병 이여백, 우군 부총병 장세작의 각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명군은 이를 모두 무리없이 물리쳤다
이후, 명군은 진영을 보통문 앞으로 전진 배치하여
조선군의 기병대로 유인작전을 펼쳤으나 왜군은 속지 않았다
음력 1월8일
앞선 이틀간 탐색전을 마친 조명엽합군이 총 공세를 가하였다
명군의 각종 화포를 이용한 엄청난 포격에 힘입어
명군 부총병 조승훈과 조선 순변사 이일이 조선군 8천을 이끌고 함구문을,
명군 부총병 장세작이 칠성문을,
명군 부총병 양호가 보통문을,
명군 부총병 오유충과 사명대사가 모란봉을 각각 공격하였다
이때 오유충은 적의 탄환을 맞고도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고,
이여송 역시 타고 있던 말이 피격하여 죽었음에도
전투를 이어나가 연합군의 사기를 높였다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중성으로 압박해오자
왜군은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최후의 저항을 하였다
이로 인해 양군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이여송은 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협상을 하여 왜군을 공격하지 않겠다 하였고,
이를 믿고 왜군은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탈출하였다
하지만 이여송은 즉시 명군 참장 이녕에게 왜군을 추격하라 하여
왜병 328명을 베었다
조선군 역시 독자적으로 추격하여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왜병 60명을
황주 판관 정화가 왜병 120명을 베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투로 인하여 자신의 동생과 사촌을 잃는 등 개인적인 피해와 더불어
왜1군 역시 만 여명이 넘는 병력을 잃어
본래 개전 초기의 1만8천이 넘던 병력이 한양에 도착했을 땐 6천6백으로 줄어있었다
평양성에서의 3번의 실패 끝에 가져온 쾌거였다
선조는 평양성을 탈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음력 1월18일 의주를 떠나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그 명성대로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주어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전투가 끝난 이후 평양성에 들어와
조선백성 1만여명을 베어 수급으로 챙겼고
버려진 시신이 대동강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 받은 명 조정은 조사관을 보내 진상을 규명하려 하였으나
그 의지는 미비하였고,
조선 조정 역시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명군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 차마 항의하지 못하였다
결국 진상규명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