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포 해전
왜 수군은 한산도와 옹골포에서
대부분의 주력을 잃고는 약 한 달간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8월 중순,
왜군은 한양에 주둔 중이던 대다수의 부대를
경상도로 이동시켰으며,
각지의 병력을 김해로, 군수품은 부산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조정은 왜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본토로 철수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이러한 왜군이 도주로를 차단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순신은 출동을 결심하였다
전라좌수군과 전라우수군, 경상우수군의 연합함대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총합 166척이라는 대함대였다
음력 8월 28일 출동한 함대는
음력 8월 29일 장림포에서 왜선 6척을
음력 9월 1일 절영도에서 왜선 9척을
화준구미에서 5척,
다대포에서 5척,
서량포에서 9척을 차례로 격파하며 부산포로 진군하였다
당시 부산포에는 하시바 히데쓰구가 지휘하는
왜선 430척이 정박 중이었다
음력 9월1일
조선수군이 장사진으로 부산포로 돌격해 들어가자
왜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설치해둔 각 진영으로 들어가
총을 쏘며 대항하였다
조선군은 육지의 병력에게 활을 쏘아가며 대응하고
함선들은 포구의 적선들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이는 왜수군의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만약 왜군의 사기가 높았다면 지금까지의 수전처럼
선박을 이용하여 대응하였겠지만,
왜군은 단지 육지에 숨어 총만 쏘아댈 뿐이었다
조선군은 약 10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육지에서 저항하는 왜병들에게 활을 쏘아
약 3000의 사상자를 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부산진성 눈 앞에 두었지만,
아군의 피로도 역시 상당했으므로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않고 함대를 철수시켰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자 25명으로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수전 사상 최초로 장수가 전사했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녹도만호 정운은 상당히 용감한 맹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돌격대장으로 백병전에도 유능했던 인물이었다
부산광역시는 이 승전을 기념하여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매년 10월 5일을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