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에서 남동쪽으로 700km 떨어진 유목지대에 위치한다. 중국과의 국경에 가까우며, 예로부터 몽골 초원과 중국 중원을 잇는 군사·교역의 요충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각 나라 사이에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부근에 있는 솜 지역에서는 1994년 8월 한·몽 공동학술조사단에 의해 고구려 성터로 추정되는 3곳과 계단식 적석층 등을 발굴하여 고구려유적임을 입증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대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넘어 동(東)몽골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발해의 강역은 사방5천리.
요사지리지 동경도 , 동경요양부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漢末 為 公孫度 所據, 傳子 康 孫 淵 自稱 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大氏 始保 挹婁之東牟山, 武后萬歳通天中 為 契丹盡忠 所逼, 有 乞乞仲象者 度 遼水 自固, 武后 封為 震國公. 傳子 祚榮 建 都邑 自稱 震王, 併吞 海北, 地方五千里, 兵數十萬. 中宗 賜 所都 曰 輝罕州, 封 渤海郡王. 十有二世 至 彛震, 僭號 改元 擬建 宫闕, 有 五京十五府六十二州, 為 遼東盛國. 輝罕州 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http://history-backup.tistory.com/23 ( 요사지리지 , 동경도 , 동경도호부 , 2번째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