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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3 03:54
[한국사]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와 낙랑군 문제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789  

0.

왕망의 지황(地皇) 연간(20-22) 염사착 기사
염사착은 진한의 우거수인데 낙랑으로 망명하러 가는 길에 진한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漢人을 만남. 漢人 1,500 명이 진한 땅에 몰래 벌목하러 들어왔다가 발각돼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것.


1.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 뒤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2.
경초(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3.
기리영전투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을 격분케/신지고국이 격분) 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4.
기리영 전투와 삼국사기 기록 교차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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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09-23 03:59
   
이미 황해도까지 3세기 고구려 무덤(장무이묘)이 발굴되었고
그밖에 고구려계 무덤이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그 이후 시기까지 서북한 지역에 즐비함에도

또 신라 초기에 신라를 괴롭히던 낙랑이 대무신왕이 낙랑을 정복한 이후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음에도

유독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만은
여러 기사를 통해
분명히 낙랑ㆍ대방 양군이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 존재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게 풀어야 할 숙제이다
     
도배시러 17-09-23 04:11
   
그런 중국인들이 삼한의 강역을 4천리라고 기록함.
침략을 하면서 상대국의 강역을 파악하는 정보력은 필수가 아니던가 ?
감방친구 17-09-23 04:08
   
그런데 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우리의 삼국사기와 너무 그 내용이 상충한다
삼국사기에 비해서 역사전개의 정도와 그 문화상의 수준을 너무 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삼국사기인가 위서동이전인가
위서동이전을 마냥 불신할 수는 있는가
도배시러 17-09-23 04:09
   
明帝 景初 237-9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신지 첨한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고 [궁준을 죽임.]
齊王 正始元年 241,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俊等奉詔書印綬詣倭國 2년뒤 궁준은 부활하여 왜국에 사신을 파견.
     
감방친구 17-09-23 04:19
   
1. 신지첨한이 아니라 신지격한분 ㅡ 신지가 한을 격분케 하여

다른 기록에는 신지고한분ㅡ 한은 나라를 뜻함(진한, 마한 등식), 그래서 신지고국이 격분하여로 해석하기도 함

2. 그러니 웃긴 것이죠
ㅡ 저는 이 위서 한조 기록이 일본서기처럼 시대와 장소,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것이라 봅니다
ㅡ 또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왜가
ㅡ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ㅡ 마한이 왜이다
ㅡ 왜가 발해에서 한반도로 다시 열도로 옮겨 갔다
하는 식의 주장이 있는 것이죠
          
도배시러 17-09-23 04:25
   
그런식으로 마한을 이용해 먹는 겁니다. 역사공백 국가를 이용하는것이죠.

낙랑군 자리에 마한이 있었다. 마한은 단일국가가 아닌 연맹체여서
그 개별 문화적 성격을 알수없다.
니들이 삼한강역 4천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감방친구 17-09-23 04:26
   
또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삼한이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는 과정을 거쳤다고요

ㅡ 변한은 화북과 요서, 진한은 만주, 마한은 한반도
ㅡ 변한은 중원계 세력과 흉노계 세력으로 인해 와해
ㅡ 최종적으로 위만조선이 망하며 한사군으로 전락
ㅡ 이 여파로 진한 와해
ㅡ 이 혼란으로 삼한이 한반도로 축소
ㅡ 그 후 다시 한반도 남부로 축소
     
도배시러 17-09-23 04:30
   
삼한 한반도남부 축소의 과정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삼한4천리 강역을 삼국지 위서에서 논한후에 축소되는 과정은 생략 되었죠.
감방친구 17-09-23 13:21
   
하ㅡ
이거 정말 풀리지 않네
타임머신이 있다면 좋을 것을
꼬마러브 17-09-23 21:20
   
기록에 모순점이 있습니다. 바로 책계왕의 기록입니다.

책계왕이 대방국왕의 딸 보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책계왕이 고이왕의 아들이라는 점이지요.

앞서 『삼국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이왕 당시 대방군과 백제국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방태수 궁준이 백제에 의해 사망했단 말이지요.... 상황이 이러한데, 책계왕이 대방군과 혼인동맹을 한다? 그렇다면 대방국왕의 딸 보과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시집을 갔다는 말이요, 기리영전투는 사돈끼리의 전쟁이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는 논리상 성립하지 않지요. ( 사실, 처음부터 대방'군', 즉 군현이라는 것은 나라(國)가 아니지요. 태수라는 자리는 세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王)은 더더욱 아니고, 외국과 혼인동맹을 맺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즉,  책계왕과 혼인동맹을 맺은 대방과, 고이왕 시기 적대관계였던 대방은 서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보아야 타당합니다. 전자는 대방국이고 후자는 대방군입니다. 이는 당시 백제가 한사군이 있었던 요서 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 분서왕의 기록으로 이어지지요.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도배시러 17-09-24 01:33
   
그와 비슷한 경우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죠.
553 三十一年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딸을 신라로 시집 보내고...
554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다가 복병에게 피살
꼬마러브 17-09-23 21:29
   
또한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우리나라의 사료가 기본이 되어야 하므로 .. 『삼국지』 보다는『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요.

이것을 전제로,『삼국사기』기록에 따라 온조왕 시기에 마한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한 시기는 온조왕 이후의 일이지요.  그러나 『삼국지』에서는 마한이 여전히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는 당시 중국인이 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무지했다는 반증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한사군이 한반도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설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즉, 당시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마한의 중심세력이 바뀐 .. 큰 사건이었다면, 『삼국지』의 기록에서 당연히 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고이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대방태수 궁준이 죽었다는 기록을 전하지요. 그것마저도 백제가 아니라 마한입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도배시러 17-09-23 22:39
   
근초고왕 사후에도 마한과 교류했던 중국의 기록이 있습니다. (근초고왕 346-375)
주류와 재야가 어캐던 마한의 대외활동을 무시하려 노력하고 있지요.
382  孝武帝 太元七年 九月,東夷5五國遣使來貢方物 十二月, 是歲,馬韓等11十一國遣使來獻。
          
꼬마러브 17-09-23 22:52
   
무슨 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마한이라는 것이 국가명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일본에 건너간 마한 세력 ? 아니면 주류의 말대로 백제 영토 내에 마한의 정치체가 잔존해 있었다든가 .. 마한의 정체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삼국지』의 '기리영전투' 에서의 한(韓)은 ,, 앞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백제를 말하는 듯 보입니다.
               
도배시러 17-09-23 23:34
   
서진동진의 진서 본기 입니다. 9월에 5개국, 12월에 11개국이 동진을 방문하죠.
꼬마러브 17-09-23 21:48
   
그리고 3번 기리영 전투의 기록 마지막에서 .. ' 이 뒤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 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는 논란의 여지도 없이 중국측의 왜곡입니다. 지금이나 예나 한(漢)족들의 특기는 과대해석이라는 말이지요....

이를 보면, 아마 한반도의 낙랑국-대방국이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대방군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삼국지』에서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낙랑국과 대방국을 '군'으로 왜곡하여 기록한 경향도 있지 않았나 합니다.
꼬마러브 17-09-23 23:02
   
덧붙여, 0번의 기록은 낙랑국의 염사가 중국의 낙랑군과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였단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토대로, 낙랑국은 고구려에 대항하여 漢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책부원구> 한국(韓國)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니 황제께서 소마시(蘇馬諟)를 염사읍(廉斯邑)의 군사로 삼아 낙랑군에 속하게 하여 계절마다 조알하게 하였다.
 
<후한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한국(韓國)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시켰다.

- 낙랑국이 위치했던 평양 지역이 본래 마한의 영역이라 ,, 당시 중국에서는 낙랑국을 '마한'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염사'는 낙랑국의 소국 중 하나인 듯?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이 기록과 위의 두 기록은 서기 44년으로 연도가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교차검증이 된다는 것...

평양 지역에서 발견되는 중국계 유물들도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지요.
     
꼬마러브 17-09-23 23:05
   
주류사학계에서는 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대무신왕 27년의 기록)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 만약 여기에서의 낙랑이 낙랑군이면, 광무제는 자국의 군현을 공격한 미친 왕이 되지요. 이는 말이 안 됩니다. 같은 시기 중국의 사서들을 보았을 때, 당시 낙랑군에서는 딱히 커다란 변화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삼국사기>에서의 낙랑은 중국의 낙랑군과는 다른 제 2의 존재로 보아야 하며 ,,, 이것이 바로 낙랑국입니다.
     
감방친구 17-09-23 23:55
   
그렇군요 후한서와 책부원구의 위 기록은 전에도 꼬마러브님이 제시해주셨는데 이걸 깜박했네요
원 게시글에 포함시키면 좋았을 것을

다만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이 아니라 진한 사람으로 돼 있는 게 걸립니다

정리하자면
ㅡ 낙랑국과 대방국의 이야기를 마치 낙랑ㆍ대방군의 일이었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뽕을 탔다는 얘기
ㅡ 고백신.  즉 옛 조선 지역에 대한 중국계 정권의 영향력ㆍ장악력을 과장하거나 그러한 게 있었던 것처럼 시대를 뒤섞거나 없던 사실을 조작하는 식으로 춘추필법을 남발했다는 얘기

결국 위서동이전의 기록의 난점은 낙랑ㆍ대방'국'을 대입하면 해결될 수 있다는 얘기
          
도배시러 17-09-24 00:20
   
그래서 제가 언급했듯이 마한 1~10국이 친낙랑계였다는 식으로 대체가 가능하죠.
그중에 하나가 낙랑국이 될수도 있는것이구요.

이렇게해야 그들이 언급한 삼한4천리가 의미가 있습니다.
               
감방친구 17-09-24 01:01
   
저는 삼한 4천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만주를 석권하고 요서를 진공할 시기에도
겨우 2 천리 어쩌고 적은 애들입니다
                    
도배시러 17-09-24 01:10
   
전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저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왜의 영토를 논할때 되는데로 기록한것으로 쉽게 알수있습니다.

하지만 삼한전쟁은 왕의 판단이 아니라 관리의 독선적 판단으로 전쟁이 발생합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인해전술 공격이 이뤄지면 관련 관리의 참수가 예상되는 일입니다.
이때의 정보파악 수준을 너무 낮게 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4~2천리 수준으로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꼬마러브 17-09-23 23:11
   
2번의 기록에서

경초(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낙랑태수와 대방태수가 바다를 건너 한(韓)을 평정했다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 ... '바다를 건너' ... 그렇다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반도와 바다 건너 있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감방친구 17-09-23 23:56
   
그렇군요 우선 통쾌한 기분이 듭니다
즉 스스로 오류를 남기고 있는 것이군요
     
도배시러 17-09-24 00:22
   
바다를 건너는 이유는 육지 경로에 산과 하천이 많을경우 입니다.
하천을 많은 인원이 건너려면 상류지역으로 우회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그런 하천이 중간에 많다면 차라리 배를 타야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중국 도착전까지 대부분을 배에서 있었느냐는 반론이 가능하죠
          
꼬마러브 17-09-24 01:54
   
하지만 통설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양 - 황해도 지역에 비정한다면, 굳이 바다를 건너 정벌할만한 세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도배시러 17-09-24 04:26
   
위서동이전을 살펴보시면
삼한의 사람이 낙랑이나 대방으로 갈때는 육로로 ...(추정)
낙랑이나 대방의 관리가 삼한으로 올때는 배를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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