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영역은 전한 시대에 존재 했으나 후한 시대에 사라진 지명, 위치는 서=>동 배열
가장 오래된 정사 사마천의 史記 에서 朝鮮列傳 조선열전을 보면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누선장군의 병사 7천명이 먼저 왕험(왕검성)에 이르렀다.
이때 위만조선의 수도는 왕험성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낙랑군 논란의 핵심은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가 조선후가 된곳이고요. 왕험성은 위만조선의 수도입니다.
史記 에서 조선열전관련 주석을 살펴봅니다. 후한시절의 인물과 당나라 인물이 주석합니다.
集解徐広曰:「昌黎有険涜県也.」 索隠韋昭云「古邑名」. 徐広曰「昌黎有険涜県」.
應劭注「地理志遼東険涜県,朝鮮王舊都」.
臣瓚云「王険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사기에 주석을 달아준 당나라 인물들은 (난하 하류)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네요.
후한시절에 존재했던 사람은 응소, 신찬이 있습니다.
응소는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수도 라고 합니다.
신찬은 왕험성(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기의 조선열전에 주석을 달면서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당대의 험독현이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면 전한과 후한의 행정구역 변동을 통해 험독현의 위치를 비정해 봅니다.
전한시절에는 요서군과 요동군이 있었습니다.
후한시절에는 요서군, 요동군, 요동속국이 있었습니다.
요동속국은 요서군에서 3현, 요동군에서 3현을 끌어와서 만듭니다.
요동군과 요서군 사이에 해당하는 곳이 요동속국입니다.
이제 후한서 군국지에서 요동속국의 6현을 살펴봅니다.
여기에 험독현, 위만의 왕험성이 있네요.
창료昌遼 故天遼, 屬遼西[1]. 빈종賓徒 故屬遼西. 도하徒河 故屬遼西.
무려無慮 有醫無慮山. 험독險瀆[2] 방房
[1]何法盛晉書有青城山.
[2]史記曰, 王險, 衛滿所都. 사마천의 사기에서 왕검성이다. 위만의 수도였다.
■ 결 론
후한시절의 인물인 응소와 신찬의 증언으로볼때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요서군의 동쪽, 요동군의 서쪽에 있었다.
후한시절 왕험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요동속국의 존재로 인해 요동의 동쪽으로 갈수없으며
요동의 범위를 확대시킨다고해도 한반도 평양까지 갈수없다. 요서군의 범위까지도 확장해야한다.
그리고 낙랑군의 위치는 왕험성의 서쪽이다.
주류사학의 낙랑군 교치는 313년이 아니라
후한시절을 타겟으로 수정하거나 폐기해야할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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