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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19 19:02
[기타] 비운의 고국원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40  

고국원왕과 모용선비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사유였다. 그는 315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331년에 고구려 16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비교적 오래 살아 60세를 넘겼고, 재위기간도 41년이나 되었다. 그는 고구려 역사상 외부의 적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겪은 왕이다. 그렇지만 그가 못났다거나, 당시 고구려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와 상대해야 했던 적들이 마침 국운상승기였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 최대의 적은 모용선비였다. 고국원왕은 태자시절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수없는 전쟁을 치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모용선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지금의 무순시 부근에 신성을 수리하도록 시켰다.

미천왕 말년이던 330년 고구려는 모용선비를 견제하기 위해 후조의 왕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어 활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후조에서는 338년에 이르러 선박 300척을 동원해서 30만 곡()의 곡식을 고구려에 보내고, 군대를 동원해 모용황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모용선비는 후조에게 압박을 받는 동진과 연합하여 후조를 견제하는 한편 후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339년에 그들의 왕 모용황이 군사를 이끌고 후조를 도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고구려군은 적과 신성에서 대치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평화를 제안했다.

“우리 두 나라의 전쟁은 양국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고구려도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터이니, 군대를 철수하여 양국간의 평화를 이룹시다.”

모용선비와의 전쟁보다는 화해를 도모했던 것이다. 모용선비 역시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했다. 고구려가 이때 먼저 모용선비에게 화해를 청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구려가 수세에 몰려 화해를 청한 것은 아닌 듯싶다. 모용선비가 쉽게 물러난 것으로 볼 때 그들 역시 고구려 성을 공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보인다. 양국간에는 일시적인 평화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3년 후인 342년 10월 모용선비는 수도를 극성에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중원 지역 정벌을 준비했다.

그런데 모용황의 형인 모용한은 동생에게 다음의 작전을 건의했다.

“우리가 후조를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후환이 될 수 있는 고구려를 굴복시키고, 이후에 우문선비를 멸망시켜야 합니다. 우문선비는 지금 공격하면 쉽게 이길 수 있으나, 우문선비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후에도 고구려는 우리의 허점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군으로 고구려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강성한 고구려를 굴복시켜야만 중원 진출이 가능합니다.”

고구려와 우문선비가 중원 세력과 협공하여 자신들을 공격하면 위태로워질 것임을 모용선비의 지도부에서는 우려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고구려의 강성함에 대해서는 모용선비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모용한의 계획에 따라 모용선비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다.


남도()와 북도()

당시 모용선비가 고구려 수도를 공격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남도와 북도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활하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고국원왕은 모용선비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작전회의를 했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우리의 수도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군이 진격하여 좁은 남쪽 길로 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협공을 받으면 쉽게 당해내지 못할 것이므로 적군은 북쪽 길로 대군을 보내고, 남쪽 길로는 소수의 병사를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에 맞추어 군대를 둘로 나누어 북쪽과 남쪽 양쪽을 함께 방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국원왕은 이와 같은 작전계획에 따라 자신은 약졸을 거느리고 남도를 방어하러 가고, 북도에는 자신의 아우인 무로 하여금 정예병사 5만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모용선비에서도 고구려를 공격하는 두 갈래 길을 놓고 작전회의를 했다. 많은 군사들과 작전참모들은 넓은 북로로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모용선비의 전략가인 모용한은 정반대의 전략을 내놓았다.

“고구려가 상식적으로 생각했다면 필연코 대군이 북도로 오리라고 여겨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왕은 그때 정예병사를 거느리고 남도로 진격하여 불의에 공격를 하면 고구려의 수도는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로 적은 부대를 보내어 북도로 나아가면 설령 실수가 있더라도 고구려의 중심은 이미 무너지게 되므로 나머지 고구려 군대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그해 11월 모용황은 자신이 직접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진격했다. 모용한, 모용패 등 유능한 장수들로 하여금 선봉을 삼았다. 또 왕우에게 군사 1만 5천을 주어 북도로 진격하게 했다.

병사수에서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방어하는 입장에서 적의 주력군을 막지 못한다면 전쟁상황은 급격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남도에서의 전투는 고국원왕의 군대와 모용한의 군대가 먼저 맞붙었다. 모용황의 대군은 곧이어 도착했다. 싸움은 고구려의 선방 속에 계속되었다. 고구려의 장군 아불화도가는 선봉장이 되어 적과 싸웠다. 남도에서 모용선비 군대가 압도적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모용선비의 좌상시 선우량이란 자가 나섰다.

“신은 본래 포로임에도 모용선비에서 잘 대접받고 있으니 이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죽어야 할 날입니다.”

그는 몇 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고구려 진영을 먼저 공격해 왔다. 고구려 군대는 그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진영이 흔들려 막지 못했다. 이에 모용황의 군대는 그 틈을 타서 공격하니 고구려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용선비의 좌장사 한수란 자가 고구려 선봉장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고구려군은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모용선비군은 승세를 타고 계속 환도성까지 추격했다. 고국원왕은 혼자 말을 타고 도주해 버릴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한편 북도에서는 고구려의 정예부대가 모용선비의 왕우 군대를 완전히 격파해 버렸다. 그리고 곧장 환도성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고구려의 약점을 쥔 모용선비

모용선비의 장군 모여니는 고국원왕을 쫓아 추격하여 왕비와 태후 주씨를 잡았다. 그러나 모용황은 더 이상 고국원왕을 추격하지 못했다. 그것은 북도에서 돌아오는 고구려의 대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모용황은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했지만, 고국원왕은 항복을 거부했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대항의 태세로 나가자 계속 환도성에 머물면서 고국원왕이 잡힐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대군이 공격해오면 막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용황은 서둘러 퇴각을 명령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구려 장군 아불화도가를 죽인 한수란 자가 나섰다.

“지금 고구려의 땅에 수비군을 두고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고구려의 왕이 도망하여 백성이 흩어져 산과 계곡에 숨어 있지만, 만약 우리의 대군이 가 버린다면 그들은 다시 모일 것입니다. 약간의 병사로는 오히려 화가 될 뿐입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고구려 선왕의 시체를 싣고 그 생모를 잡아서 돌아가 고구려가 우리에게 굴복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선왕의 시신과 왕의 생모를 돌려받기 위해 우리에게 대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황은 한수의 작전이 옳다고 여기고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싣고, 창고에서 여러 세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문 뒤 퇴각해 버렸다.

고구려의 대군이 환도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들이 퇴각한 후였다. 고구려군은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주씨태후의 안전을 염려하여 쉽게 그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모용선비는 고구려를 완전히 패망시킬 수도 없었고, 실력면에서도 고구려에 앞선 것은 아니었다. 모용선비는 고구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구려의 약점을 쥐고 탈출했던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신은 죽은 영혼이 이승과 연결하는 끈이 되었다. 무덤을 장엄하게 만든 것도 죽은 자가 산 자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조상숭배에 대해서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고구려 사람들에게 선왕의 시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모용선비가 철수한 지 3개월 후인 343년 2월 고국원왕은 동생을 모용선비에게 보내면서 신하라고 자처하고 수천 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바쳤다. 굴욕적인 태도를 감수한 까닭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를 돌려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보내고,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여전히 인질로 잡았다. 그것은 고구려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반면 모용선비는 고구려를 굴복시킨 여세를 몰아 343년 2만 명의 군대로 우문선비를 멸망시켰다. 모용선비에게 우문선비는 고구려에 비해 훨씬 수월한 상대였다. 그런데 우문선비의 왕 일두귀는 나라가 망하자 고구려로 망명을 왔다. 고구려가 일두귀를 받아들인 것은 언젠가는 모용선비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여전히 모용선비를 적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어머니가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 한동안은 모용선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345년 모용선비는 고구려 변방의 남소성을 공격했다. 일두귀의 소환을 요구하는 공격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용선비 놈들이 남소성을 공격해 왔다는 보고이옵니다. 원병을 보내시어 저들을 격퇴하게 하옵소서.”

“저들의 이번 공격은 다른 의미가 있소이다. 우리가 대병을 이끌고 싸운다면 저들도 대병을 파견할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태후마마를 돌려주려 하지 않을 것이오. 원통하지만 이번에는 남소성 한 군데에서 방어에만 전념해 주시오.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명하시오.”

고구려가 과연 모용선비에게 복종을 하고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저들의 의도를 고국원왕은 알고 있었다. 모용선비는 남소성을 점령하고 주둔군을 두기도 했다. 고구려를 감시하는 전방기지를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일두귀를 보내지 않았다.

모용선비는 고구려가 위협이 되지 않음을 확인하자 적극적으로 강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중원으로 진출해서 349년 황하 하류 일대를 장악한 전연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전연은 한때 인구 천만을 자랑하며 화북지역의 최강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때 고구려에서 바친 진기한 물품과 고구려 포로들이 그들의 힘이 되었음을 두말 할 것도 없다. 한 번의 작전 실패가 양국의 운명을 이토록 갈라놓은 것이다.

355년 전연은 이제 실력으로도 고구려를 앞선다고 자부해서인지 태후를 돌려보냈다. 무려 13년 만의 일이었다.

고국원왕은 칼을 갈며 더 이상 모용선비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사신의 왕래도 끊겼다. 그런데 370년 저족이 세운 전진은 북중국의 패권을 놓고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전연을 멸망시켰다. 북한학계에서는 이때 고구려가 전진과 함께 전연을 공격하여 지금의 북경 일대의 유주 지역을 일시 차지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전연이 멸망하자 전연의 태부 직위에 있던 모용평이 전진의 군대를 피해 고구려로 도망온 사건이 발생했다. 고국원왕은 당장 모용평을 붙잡아서 전진에 선물로 보냈다. 모용선비에 대한 한맺힘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진은 고구려의 이와 같은 호의를 반겼고, 372년에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주는 등 우호국가가 되었다.


고국원왕의 두 번째 불행

고국원왕은 모용선비에게 당한 후 내실을 기하는 데 주력하여 파괴된 수도를 재건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돌보았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피해가 적은 평양 일대를 개척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남쪽 백제와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비록 두 나라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고 추모왕을 함께 조상으로 섬겼지만 수백 년의 세월은 양국간의 문화적 차이와 함께 서로 별개의 국가라는 이질감을 낳았다. 또한 황해도 지역 지배권과 서해의 해상지배권을 놓고 양국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당시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국원왕으로서는 연이어 강자들을 만난 셈이었다. 적대국 전연이 멸망하고 동맹국과 같은 전진이 등장하자 고구려 서부 전선에는 급격히 위기감이 사라진 반면 새롭게 부상하는 백제로 인하여 남부 전선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369년 고국원왕은 친히 보병과 기병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했다. 고국원왕은 치양 지역에 군대를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백제의 민가에서 우선 양식을 구했다. 이때 백제에서는 근초고왕의 태자인 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고구려군과 대치했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사기란 자가 몰래 백제군으로 도망을 쳤다. 사기는 본래 백제인으로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에 와서 살던 자였다. 사기는 백제 태자 근구수에게 고구려 진영의 약점을 보고했다.

“고구려 군대가 많기는 하지만, 대개는 머릿수를 채운 잡군에 불과합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색 깃발을 든 부대뿐이니, 그들을 먼저 깨뜨리면 나머지 고구려군은 공격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백제군은 사기의 말에 따라 고구려의 주력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고구려 주력군이 무너지자, 나머지 병사들 가운데 백제군에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 고구려군은 이 싸움에서 무려 5천여 명이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대패를 당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백제군에게 패배하다니 원통하구나. 고구려에서 떨어져나간 백제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추모왕님과 유리명왕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군대를 모아 백제를 반드시 정벌하리라.”

고국원왕은 60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371년 다시 한 번 백제 공격을 명령했다. 고구려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제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백제군을 매복시켜 두었다. 고구려군은 이를 모르고 진격하다가 백제군에 기습을 당해 대패하고 말았다. 그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정예병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내어 백제군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백제군이 날린 화살이 고국원왕을 맞추고 말았다. 고국원왕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고구려군은 급히 왕을 모시고 퇴각했다. 그러나 화살을 맞은 고국원왕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내 죽고 말았다. 고구려 역사상 유일하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고국원왕은 모용선비와 백제에게 시달리다가 마침내 화살을 맞아 죽고 말았다. 용감하게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죽은 고국원왕. 임진왜란 때 총 한번,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무조건 도망다닌 선조 임금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용감한 고국원왕. 하지만 그는 거듭된 불행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감하고 말았다. 고국원왕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고구려에게 다시 재도약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고국원왕의 한()은 그의 손자인 광개토대왕을 기다려 풀릴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운의 고국원왕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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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7-08-19 19:36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 백제 책계왕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이때가 대륙 백제를 漢(전조-5호16국)와 貊人(고구려) 가 공략한 시점이 아닐런지...
     
꼬마러브 17-08-19 20:17
   
기록의 한(漢)은 국가명이 아니라 종족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한(漢)족을 말하지요.

기록 당시 ,, 한나라는 이미 수십년 전에 멸망한 나리이고 중원에 진(晉)나라가 있을 시절이기 때문에 .. 한나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상 옳지 않습니다.

아마 이 기록에 나오는 한(漢)은 낙랑군이 아닐까 합니다.
          
도배시러 17-08-19 20:32
   
전조에 의한  永嘉之亂 에 서진이 망하고 동진으로 교체됩니다.
흉노족 유연이 건국한 전조의 초기 국호가 漢 입니다.
               
꼬마러브 17-08-19 20:36
   
흉노족 유연이 세운 한나라는 기록으로부터 6년 뒤인 서기 304년에 세워집니다.
                    
도배시러 17-08-19 20:42
   
넵... 그게 조금 애매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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