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란
본관 청해(靑海). 자 식형(式馨). 본성 퉁[佟]. 초명은 몽고식 이름인 쿠란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다. 시호 양렬(襄烈).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이며, 화영(和英)의 아버지이다. 함경도 북청에 거주하면서 이성계와 친밀하게 지냈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자 고려 공민왕 때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에 귀화한 뒤에 이씨(李氏)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받았다.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운봉(雲峰)전투 등에 공을 세워 공양왕 때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를 역임하고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으며 1393년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로 왜구를 방어했다.
후에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按撫使)가 되어 갑주(甲州)와 공주(孔州) 두 성을 축조했으며 1398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때 제l차 왕자의 난을 수습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이 되었다. 후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웠다. 1400년(정종 2) 방간의 난(제2차 왕자의 난) 때 재차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태조가 은퇴하자 영흥(永興)에 시종했다가 승려가 되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란 [李之蘭] (두산백과)
청해
청해(靑海)는 남옥저 이후 고구려 영토였으며, 698년(신라 효소왕 7) 발해의 남경남해부(靑海土城)를 설치하였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1258년(고종 45)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으며, 1392년(공양왕 2)에 북청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 청주부로 고쳤다가 얼마 후 다시 북청으로 고쳤고, 1427년(세종 9)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북청군이 되었고, 1896년 함경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지역에 해당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해이씨 [靑海李氏] (성씨와 본관, 2011. 1. 14.,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옥저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지역으로 여겨진다. 『삼국지』 권28 구검전(丘儉傳)에는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가 왕기의 추격을 받고 옥저(沃沮)에서 천 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매구(買溝)를 남옥저의 일부로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 옥저전에 ‘宮(位宮으로 곧 東川王--주석자)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買溝) 去南沃沮八百餘里’라 한 것에 의거하여 동천왕이 북옥저 지역 곧 간도(間島)지방으로 도망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옥저 [南沃沮]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북옥저
《삼국지》에 의하면 읍루의 남쪽, 남옥저의 북쪽 800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는 바,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함경북도 북부와 간도(間島)지역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지》에서는 일명이 ‘치구루(置溝婁)’라고 했으나, 이는 북옥저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중심지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경성설(鏡城說)·혼춘설(琿春說) 등이 있다.
북옥저의 형성시기는 미상이나 최근 전국시대(戰國時代)에서 후한시대(後漢時代)에 걸쳐 두만강·목단강(牧丹江)·수분하(綬芬河) 유역에 분포한 단결문화유형(團結文化類型)을 북옥저문화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바, 그렇다면 그것은 서기전 4세기까지로 올려볼 수도 있다.
여름에는 읍루족이 배를 타고 와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산 속 동굴에서 살다가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못하는 겨울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살았고, 그래서 사회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서기전 28년(동명왕 10)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그 연대를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북옥저가 비교적 일찍 고구려의 세력권에 흡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45년(동천왕 19)에는 위나라의 침입을 받은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王頎)의 추격군에 쫓겨 북옥저까지 피신한 적도 있었다. 북옥저의 풍속은 남옥저와 같다고 한다. →옥저(沃沮)
[네이버 지식백과] 북옥저 [北沃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부여
그런데「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 적어도 5세기 초에 실재하는 동부여가 확인된다. 이때의 동부여는『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북옥저(北沃沮)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 유역에 해당된다. 이것은『삼국지』관구검전(毌丘儉傳)에서 동천왕(東川王)이 위(魏)에게 쫓겨 피난했던 매구루(買溝婁)가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는 치구루(置溝婁)로 표기되었고, 이것이 바로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이며「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전하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仇婁)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3세기경 동부여는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부여 [東夫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